12화
하교 종이 울리자마자 가방을 메고 교실을 빠져나가는 이진을 따라잡으려 서호의 걸음 속도도 덩달아 빨라졌다. 체육대회 종목을 정하고난 후 이진은 서호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래도 서호는 계주에 이진의 이름을 올린 것에 대해 조금도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가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인지는 서호 본인만 알 뿐이었다.
“윤이진 너 걸음 진짜 빠르다. 발에 바퀴 달렸어?”
운동장을 걸어 나가는 이진의 그림자를 간신히 따라잡은 서호는 입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이제는 아예 서호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건지 이진은 대답 없이 곧장 앞으로 발걸음을 빠르게 놀릴 뿐이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냉기를 눈치챈 배영은 영문도 모른 채 둘의 뒤통수를 번갈아보며 고갯짓을 갸웃거렸다.
“너 화났어? 내가 계주에 너 이름 올려서?”
“화났다고 하면. 이제라도 내 이름 빼주게?”
이진이 틱틱대는 말투에서 그녀의 기분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호는 자신의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듯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만연해있었다.
“아니? 나랑 같이 계주 하자. 나 믿어봐. 내가 1등 하게 해 줄게.”
“어련하시겠어. 강진고 프린스가 명령하신 건데.”
조롱하듯 내뱉는 이진의 말에 순간 배영이 풉, 하며 미처 막지 못한 침다발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옆에 서 있던 서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닦아냈다. 민망하게 표정을 가다듬는 서호를 쳐다보던 배영이 장난기 서린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야. 윤이진 너 권서호 별명이 강진고 프린스인거 어떻게 알았냐? 이 새끼 이거 그 별명 제일 혐오하는데.”
“고배영. 넌 좀 닥쳐.”
“아, 왜. 너 따라다니는 1학년 여자애들한테서도 강진고 프린스라고 불린다며? 왕자님. 기체후일향만강하시옵니까. 아 이건 세자한테 하는 말인가?”
서호를 약 올리기로 작정한 배영이 킬킬거리며 그를 향해 장난 섞인 농담을 던졌다. 서호는 미간을 좁히더니 배영을 향해 살기 섞인 눈빛을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영은 강진고 프린스라는 별명이 기폭제가 된 듯 연신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배를 잡고 웃는 배영을 흘깃 쳐다본 이진이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서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까 어떤 여자애 두 명이 나한테 와서는 너랑 사귀냐고 대뜸 물어보더라.”
“…그, 그래서 너 뭐라고 대답했는데?”
난데없이 들어온 이진의 말에 서호의 얼굴은 괜스레 붉어졌다. 서호는 말까지 더듬으며 이진의 대답을 잠자코 기다렸다.
“뭐라고 하긴. 아무 사이 아니니까 괜히 오해하지 말라고 했지.”
“….”
이진의 무성의한 대답을 듣자 서호의 얼굴에 실망감이 퍼뜩 스쳐 지나갔다. 그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던 배영이 옆에서 거들었다.
“근데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내가 봐도 너네 둘 뭐가 있어 보인단 말이지.”
이진은 뱁새눈을 하고 배영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서늘한 눈빛에 압도당한 배영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깨갱거렸다.
“아니, 내 말은 너는 몰라도 적어도 권서호 이 새끼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 않나 하고….”
배영은 도와달라는 듯 서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서호는 여전히 이진의 얼굴에 눈길을 집중한 상태였다.
“아무튼. 난 너랑 계주 할 생각 없어. 네가 저지른 일이니까 권서호 네가 책임지고 나 계주 말고 다른 거에 명단 올려줘. 피구든 발야구든 빨리 아웃될 수 있는 거면 상관없어. 아니면 그냥 출석 안 하면 그만이야.”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안 되지.”
서호는 몸을 뒤로 돌며 이진을 마주 본 채 뒤로 걸었다. 키가 큰 그의 시선을 올려다보는 이진의 표정은 여전히 서늘한 상태였다. 그녀의 날 선 얼굴을 내려다보며 서호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 번 달려봐. 누가 쫓아와서가 아니라. 네 스스로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본 적 있어?”
“….”
순간 이진의 얇은 두 다리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가방끈을 꼭 쥔 채 서호를 올려다보는 이진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의 숨겨둔 진심을 그대로 꿰뚫은 서호의 질문에 이진은 이상하게 부아가 치밀었다.
서호는 그런 이진의 얼굴을 가만히 직시하며 조곤 하게 덧붙였다.
“나한테 행운이 어떤 방식으로 달라붙는 건지. 궁금하지 않아?”
뚱딴지같은 서호의 말을 듣고 있던 배영이 냉랭해진 분위기를 깨려 다시금 농담을 던졌다.
“야, 너네 왜 그러냐. 근데 윤이진 진짜 체육대회 때 너 그냥 설렁설렁 뛰기만 해도 1등 문제없을걸? 권서호 이 자식 달리기 하나는 내가 본 사람들 중 탑이거든. 중학교 때까지 육상….”
배영이 마지막 말을 내뱉기 전에 서호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 바람에 배영은 옆구리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야 권서호 말로 해 말로.”
“고배영. 점점 눈치 상실하고 있지?”
아무렴 배영은 고개를 흘깃 들어 서호의 눈치를 살폈다. 배영의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끝내 그는 더 이상 이어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너는 이번 체육대회 때 나랑 계주 나가야 돼. 긴장할 것 없어. 마음 편하게 먹고 이 오빠만 보고 달려와. 알겠지?”
해사한 웃음을 잔뜩 지으며 이진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친 서호가 다시 몸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고 그녀를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아직도 서호에게 찔린 옆구리에 손을 얹고서 배영은 절룩거리며 서호의 뒤를 좇아갔다.
새카맣고 작은 서호의 뒤통수를 말없이 쳐다보던 이진의 시선이 조금 떨려오고 있었다.
그날 밤.
시계는 열한 시를 향해 조용히 시침을 옮기고 있었다.
서호는 보고 있던 참고서를 덮으며 뻐근해진 눈가를 두 손으로 가만히 문질렀다.
얕은 하품을 내뱉던 서호는 순간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지자 고개를 돌렸다.
액정 화면 위로 ‘윤이진’이라는 세 글자를 발견한 서호의 동공이 조금 커졌다.
잘못 걸었나?
멈칫하며 전화를 받을까 고민하던 서호는 이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윤이진?”
“….”
“무슨 일 있어? 잘못 건 거야?”
“… 권서호.”
서호의 귓가에 잔뜩 습기를 머금은 이진의 먹먹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대번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급히 물었다.
“왜. 너 무슨 일 있지. 어디야 지금.”
“… 이런 말 너무 어이없는 거 아는데.”
“….”
“네가 가진 행운이라는 거. 진짜 있어? 그거 나 좀 나눠주라.”
“… 뭐?”
뜬금없는 질문에 밖으로 향하려던 서호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췄다. 서호는 휴대폰을 다시 고쳐 잡았다.
“무슨 말이야. 너 지금 어딘데.”
“… 밑에.”
“어디?”
“능소화 담벼락 밑에.”
서호는 눈동자를 굴리며 이진이 말한 능소화 담벼락이 어디인지 떠올리려 했다. 그리고 이내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챈 서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현관을 향해 뛰쳐나갔다.
대문을 급하게 열고 나가자 능소화 넝쿨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담벼락 아래 마치 한 마리 고양이처럼 이진이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서호는 조심스레 이진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만연했다.
인기척을 느낀 이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녀의 눈가 주변에는 아직도 눈물 자국이 선연했다. 느리게 일어나던 이진이 어느새 자신 앞에 바짝 다가온 서호를 향해 다시금 되물었다.
“네가 가진 행운 좀 나 나눠줘. 지금은 그거라도 믿고 싶은 심정이야.”
“…무슨 일인데. 울었어?”
상체를 숙이며 그녀의 안색을 살핀 서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이진이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이윽고 먹먹한 목소리를 입 밖에 내었다.
“…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지금 병원에 있대. 근데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나 봐.”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너 지금 병원에 가봐야지.”
“이모가 갔어. 내가 가봤자 별 소용없으니까.”
서호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이진을 향해 수군거리던 그 무당을 떠올렸다. 그분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이진은 지금 얼른 병원으로 가는 게 맞지 않나.
“일단 병원이 어딘데. 네가 딸이니까 네가 가봐야지.”
“십 년을 안 보고 살았어. 이젠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나.”
“… 뭐?”
“… 사람들은 나더러 무당 딸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거 아닌데. 나 낳아준 엄마는 정작 나 버리고 도망가고. 갑자기 사고당했다고 연락이 와서 나보고 어쩌라고….”
주절주절 내뱉는 갈피 없는 문장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새어 나왔다. 이진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차올라 점점 멀미가 났다. 주체할 수 없이 삐져나오는 눈물이 검은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두 눈을 꿈벅거리며 이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서호는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는 이진을 말없이 내려다보는 서호의 표정 또한 점점 일렁거렸다. 그의 얼굴은 연민 그 이상을 넘어 동질감을 느끼는 묘한 표정이었다.
“집에 혼자 있는데. 갑자기 너무 무서워져서.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나한테 들러붙은 불행이 일을 저질렀나 싶고. 근데 갑자기 네가 생각이 나서. 네가 가진 행운이라는 거 진짜 있으면 나 좀 빌려주라. 그래도… 엄마니까. 이제 나한테 남은 가족은 그 사람 밖에 없는데….”
울음이 가득 찬 목소리로 꾸역꾸역 내뱉는 이진의 작은 입술을 내려다보는 서호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울고 있는 이진을 그저 보고 있기가 힘들게 느껴졌다.
서호는 말없이 그녀의 작고 여린 두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잠깐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리던 서호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눈물만 뱉어내는 이진을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이진은 힘없이 그대로 끌려와 서호의 왼쪽 어깨 아래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어깨 아래로 느껴지는 쿵쾅쿵쾅 요동치는 소리가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인지 이진을 통해 전해지는 소리인지 서호는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사실 지금은 그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진의 작은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쥔 서호의 커다란 손이 말없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다 가져가. 내가 지금까지 모은 거 다 너 줄게. 괜찮을 거야.”
서호는 느리게 그리고 자신도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이진에게 말을 건넸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어깨에 기대 있는 장면 위로 아직 채 피지 않은 능소화 꽃망울이 하늘에 뜬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