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어깨 나의 무릎

13화

by 안스

상황은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다.


이진은 다음 날부터 일주일 동안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담임이 표면적으로 내비친 이유는 가족상이었다. 서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행운이 아무 쓸모가 없었다는 낭패감에 빠졌다.


배영은 그의 낙담한 표정을 빠르게 눈치챘다. 넌지시 이진의 상황을 묻는 배영의 질문에 서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일주일 동안 서호의 마음속에는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은 채 능소화 담벼락 밑 웅크리고 앉아있던 이진의 새카만 머리통이 둥둥 떠다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진이 일주일 만에 등교한 그날은 체육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전날 밤에 서호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진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고민하던 그의 엄지손가락이 오갈 데 없이 우왕좌왕했다.


괜찮냐고 시니컬하게 썼던 메시지는 금세 지워지고 밥은 먹고 다니는지 안부를 물어보려다가 점점 길어지더니 내일 체육대회에서 자신이 대신 계주에서 일등을 할 테니 걱정 말라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쓰기 시작했다.


결국 거의 열 줄이 넘어가던 메시지를 황급히 지운 서호는 고민 끝에 군더더기를 뺀 담백한 문장을 이진에게 전송했다.


[내일 체육대회야. 응원해 줘.]


메시지 옆에 숫자 ‘1’이 사라질까 뚫어져라 액정화면을 내려다보던 서호는 결국 잠들기 직전까지 손에 휴대폰을 쥐고 있었고, 그날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 숫자 ‘1’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보낸 메시지 옆 ‘1’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서호는 오늘은 이진을 볼 수 있겠다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체육복을 단정하게 입고 자리에 앉아있는 이진을 확인한 서호의 입가에 반가운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그의 표정 변화를 모를 리 없는 배영이 혀를 끌끌 차며 서호를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다가갔다.


“… 왔어?”


이진의 자리로 다가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는 서호의 표정은 약간 긴장이 서린 상태였다. 의자에 앉은자리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이진의 표정은 직전의 만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이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서호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응원해 달라며.”






오전 조례 이후 곧바로 시작된 체육대회는 각 학년의 반 대항으로 진행되었고, 남자 학생들이 주축이 된 축구, 농구와 여자 학생들이 참전하는 발야구, 피구 그리고 남녀 학생들이 각각 참여하는 씨름을 거쳐 대망의 마지막 경기 계주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체육대회의 꽃이자 피날레인 계주만큼은 반 대항이 아닌 학년 대항으로 수능 준비에 여념이 없는 3학년을 제외한 1, 2학년에서 반 별로 4명씩 차출되어 팀을 이루었다.


이진은 남, 녀 계주 다음 순서인 혼합 계주에서 3번째 주자로 나설 예정이었고, 서호는 마지막의 마지막을 장식할 4번째 라스트 주자로 800m 운동장 1바퀴를 온전히 다 뛰어야 했다.


구분할 수 없이 사방팔방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들로 이진의 두 귀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막상 출발선에 서니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두근거림이 지속되었다.

조금 있으면 3백여 명 가까운 학생들의 시선이 자신의 달리기에 집중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평소에 평정심을 꽤나 잘 유지하던 이진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손끝까지 덜덜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이진은 머릿속으로 약 10여분 전 서호가 자신에게 다가와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른데 한눈팔지 말고 배턴 잡자마자 나만 보고 달려. 추월당해도 되고 꼴등해도 상관없으니까 내 얼굴만 보고 달려와. 알겠지.’


긴장한 탓에 운동장 한 구석에 멀뚱히 서있는 이진에게 다가온 서호는 그녀의 작은 머리 위에 턱, 손을 올리더니 다정한 눈빛을 띄며 말해주었다.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진을 보며 서호는 한번 더 상기하듯 덧붙였다.


‘오늘 있는 힘껏 달려봐. 내가 앞에 서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누군가의 부름에 서호의 걸음이 움직이려는 찰나, 그의 체육복 상의 끄트머리를 이진의 하얀 손가락이 붙잡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서호는 이진의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진은 아래로 향해있던 고개를 천천히 위로 들어 올리며 여름 햇살이 청량하게 스며들고 있던 서호의 얼굴을 응시했다.


“… 혹시 넘어지면 어떡해.”


이진의 바보 같은 물음에 피식하고 웃음을 짓던 서호의 입에서 따뜻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그럴 리 없어. 넌 걸음은 좀 희한하게 걷긴 하는데, 달릴 때는 또 야무지거든.”





날카로운 고음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체육대회의 마지막 경기인 계주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주자들이 그 소리에 너도나도 빠르게 발을 놀리며 트랙을 무섭게 달려 나갔다.

그들이 빠진 자리에 얼른 순서를 지켜 차례대로 선 3번째 주자들 사이에 바짝 얼어붙은 이진의 얼굴이 단연 눈에 띄었다.


첫 번째 주자들은 금세 운동장 반바퀴를 달려 두 번째 주자에게 배턴을 건넸다.


엎치락뒤치락하며 달리는 주자들 사이로 운동장을 둘러싸고 들어찬 관중들의 함성이 빽빽하게 스며들었다.


각 학년들이 응원하는 함성 소리에 이진은 정신 바짝 차리자고 마음속으로 단속했다.


한 번 달려보는 거야.

까짓 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그냥 눈 딱 감고 달려보는 거야.


정은의 장례식을 끝마치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에 도착한 혜숙과 이진은 둘 다 말없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밀린 잠을 몰아자기 시작했다.


별다른 조의객도 찾아오지 않는 한적한 장례식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진과 혜숙은 3일장 내내 푹 잠에 들지 못했다.


이진은 그래도 이곳이 집이라고 편안함을 느꼈던지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마치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이진은 그날 밤 간간이 흐느꼈다.


어제까지 울었던 눈이었다. 피곤함에 방금까지도 뻑뻑함을 느끼던 눈이었지만 이제 곧 전교생의 이목을 집중받으며 4백 미터 남짓을 달릴 생각 하니 두 눈을 뜨고 감는 눈꺼풀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하룻밤 사이에 전혀 다른 바이브를 느끼고 있는 이진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닥친 상황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이상하게 상쾌함을 느끼던 찰나였다.


이윽고 거의 가까워진 두 번째 주자가 이진을 향해 파란 배턴을 뻗으며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이진은 눈치껏 배운 대로 달려가야 할 방향을 향해 몸의 전면을 돌린 채로 오른손만 뒤로 뻗어 발걸음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자신의 오른 손바닥에 탁, 하고 파란색 배턴이 착 감기는 순간 이진은 아랫입술을 있는 대로 질끈 깨물으며 앞으로, 앞으로 내달렸다.


함성소리는 먹먹하게 귓가를 떠다녔다. 이진은 반바퀴 앞에서 자신을 향해 시선을 집중한 채 서 있는 서호만을 보며 두 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자신이 지금 몇 등으로 달리고 있는지는 까먹은 채로 그저 이 트랙 위에서 넘어지지 않고 손에 쥔 배턴을 서호에게 안전하게 전해준다는 일념 하나로 이진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달렸다.


고작 운동장 반 바퀴를 달리는 데도 숨이 점점 턱 끝까지 차올랐고, 다리에 서서히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진은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스퍼트를 올려 두 팔을 앞 뒤로 열심히 휘저었고 다리에 힘을 바짝 주었다.

위로 높게 묶은 이진의 포니테일이 그녀의 달리는 반동에 맞추어 좌우로 힘차게 움직였다.


트랙의 절반 넘게 거의 달려가자 서호를 제외한 나머지 마지막 주자들은 정면으로 뒤를 돈 채 손을 뻗은 채로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 중 오직 단 한명만이 등을 보이지 않고 이진과 마주 선 채로 그녀를 향해 기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하고 있어.

나만 믿고 끝까지 달려.


서서히 뚜렷하게 보이는 서호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운동장을 둘러싼 관중들이 그의 쌩뚱맞은 행동에 어리둥절해하는 것이 이진에게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곧장 달려 나가려면 다른 주자들과 마찬가지로 손만 뒤로 뻗은 채 등을 보여야 할 서호는 오히려 여전히 이진만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벌리고 손짓하고 있었다.


이진은 순간 가쁜 숨만이 차오르던 폐속에 밀물같은 물이 밀려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 울음은 어젯밤 베개에 다 쏟아냈다고 생각한 이진이었다.


첫걸음을 떼는 아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시선처럼 든든한 눈빛을 보내는 서호의 얼굴에 점점 다가갈수록 이진의 얼굴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서호의 이미지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비오던 날 우산을 쓰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던 그의 모습이.

같이 밥 먹자며 능글맞게 웃음짓던 모습이.

술취한 아저씨에게 쫓겨 슬리퍼차림으로 달아나던 자신의 두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주던 모습이.

방울토마토와 싸구려 홍삼젤리를 입안 가득 오물거리던 서호의 얼굴이.


마침내 서호를 제외한 다른 주자들이 배턴을 건네받고 출발하고 나서야 이진은 가까스로 서호의 손에 파란색 배턴을 쥐어주었다.


탁.


배턴을 건네던 그 순간조차도 서호는 이진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은 상태였다.

이진과 서호 둘의 시선이 맞부딪히던 그 찰나의 순간에 이진은 서호가 눈빛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있음을 느꼈다.


잘했어.

이제부터는 나한테 맡겨.

수고했어.


마치 슬로모션이 걸린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 순간만큼은 그 공간 속 이진과 서호 단 둘만이 존재하는 공명을 느꼈다.


파란색 배턴이 이진의 손에서 서호의 손으로 이어지던 순간, 이진은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앓고있었던 부담감과 억울함이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래서 나더러 계주 하라고 한거구나.

그래서 나보고 있는 힘껏 달려보라고 한거구나.


너 진짜 희한해.


서호가 이진이 건넨 파란색 배턴을 쥐고 곧장 뒤를 돌아 달려 나가자마자 이진은 가까스로 바로 옆 잔디밭을 향해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헥헥대며 들숨 날숨이 앞다투어 나오는 입안은 점점 바짝 말라가고 있었지만, 서호의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진의 두 눈가는 어느새 굵은 눈물을 툭툭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진의 배턴을 건네받은 서호는 몇 초간 지체했던 출발 스퍼트를 만회하듯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마치 한 마리 야생 동물처럼, 누구보다도 빠르게 달리기 시작하는 서호의 모습을 바라보는 학생들은 언제 그랬냐는듯 일제히 커다란 함성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계주의 마지막 주자인만큼 각 학년과 반에서 제일 날쌔다는 주자들로 선발되었을 텐데도, 서호는 게 중 단연 눈에 띄었다.


“와!”

“권서호! 권서호!”


이때만큼은 온 전교생이 한 마음이 되어 서호의 이름을 큰 소리로 응원하고 있었다.

이진 또한 달리는 서호에게 시선을 빼앗긴 상태였다. 안정적인 자세와 구름 위를 달리듯 가볍게 땅을 내딛는 그의 두 다리.

이진이 건넨 파란 배턴을 꼭 쥐고서 빠른 속도로 달리는 서호를 보던 이진의 얼굴은 감격에 차오르고 있었다.


4번째로 달리던 서호는 순식간에 앞서 뛰던 2명을 앞질렀고, 그때마다 단말마 같은 함성들이 날아와 꽂혔다.

마침내 운동장 한 바퀴에 다다를 때쯤에는 첫 번째 주자 뒤를 거의 다 따라잡은 상태였다.


“꺄아악!”


8백여미터를 순식간에 뛰어온 서호가 타원형의 트랙을 돌아 이진의 배턴을 건네받은 그 시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순간, 이진은 서호가 마치 자신을 향해 뛰어오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끝내 아슬아슬한 차이로 결승선에 서호가 먼저 들어가자, 손에 땀을 쥐고 쳐다보던 배영을 포함해 주변 사람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진의 입에서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숨이 삐져나오고 있었지만, 먹먹한 눈가는 여전히 서호를 향한 상태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자신에게 달려드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하이파이브와 가벼운 포옹을 나눈 서호의 시선이 이내 두리번거리더니 잔디밭 위에 주저앉아있는 이진의 눈과 마주쳤다.


전속력을 다해 달린 탓인지 얼굴은 살짝 붉어져있었고, 귓가 옆으로 엷은 땀줄기가 흐릿하게 보였다.

숨을 색색 내뱉는 그의 얼굴은 아직 심박수 때문에 흥분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지만, 표정만큼은 뿌듯해보였다.


서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거 봐. 내가 1등 할 거라고 했지.


내 행운은 이런 식으로 나에게 붙어.


하고 그가 속삭이는 듯 했다.


불행이 덕지덕지 붙어있다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내기만 하던 이진은 그때 처음으로 자신에게는 행운이 저절로 따라온다던 서호의 말이 이해가 갔다.


이진은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이진을 보며 서호는 잠깐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보답하듯 함박웃음을 말갛게 지어 보였다.


어느새 둘 사이를 기웃거리던 우연은 벌써 시작된 무더위에 일찌감치 운명으로 녹아버린 후였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12화너의 어깨 나의 무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