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어깨 나의 무릎

11화

by 안스

쉬는 시간 화장실에 다녀오던 이진의 앞을 두 명의 여학생이 막아섰다. 이름까지는 몰랐고 몇 번 복도에서 급식실에서 혹은 교내에서 오다가다 마주친 적이 있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멀뚱히 자신들을 바라보는 이진의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한채 두 여학생은 긴히 할 말이 있는 듯 이진을 화장실 옆 계단참으로 이끌었다.


“너 3반 윤이진 맞지?”

“… 그런데?”


경계의 눈빛을 숨기지 않으며 이진은 되물었다. 두 여학생 중 얼굴이 더 하얀 여학생이 대뜸 본론을 꺼냈다.


“너 혹시 3반 반장이랑 사겨?”

“무슨 말이야?”

“권서호랑 너. 사귀냐고.”


난데없이 계단 구석으로 끌려와 듣는 질문치고는 황당하기만 한 물음에 이진의 작은 두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진의 표정을 보고서도 그녀의 확실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얼굴이 좀 더 하얀 학생이 채근하듯 재차 물었다.


“너 맨날 권서호랑 밥 먹고 집에도 같이 간다던데? 사귀는 거 아니야?”

“아니야.”


단호한 음성이 이진의 입에서 곧장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진의 대답이 마땅찮은 듯 다른 여학생이 눈빛을 새초롬하게 뜨며 물었다.


“진짜 아니야? 썸도 아니야?”

“… 하.”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어떻게 뭘 더 정확한 대답을 해줘야 하는 건지. 이진의 입에서 답답한 한숨이 작게 새어 나왔다. 점점 굳어지는 이진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두 여학생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이진은 맞은편의 두 여학생을 짧게 번갈아 바라본 후 쐐기를 박듯 입을 열었다.


“… 권서호랑 나 사귀는 것도 아니고. 썸도 아니야. 더 확실한 대답이 필요해?”

“아니 그럼 너 왜 매일 권서호랑 붙어 다녀?”


서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두 여학생 중 얼굴이 더 하얀 여학생이 분명했다. 이진의 대답이 시원찮은 그 여학생은 어서 빨리 변명해 보라는 듯 팔짱 낀 상체를 이진에게 더욱 바짝 갖다 댔다.

순간, 이진은 그 여학생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퍼뜩 생각이 나지 않았다.


왜 매일 붙어 다니냐고.

정확하게 전학을 오고 나서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진은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전학 첫날부터 서호와 그리고 그의 죽마고우 배영과 같이 보낸 시간이 혼자 보낸 시간보다 훨씬 많음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 같이 점심을 먹자고 서호가 달라붙었을 때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어느샌가 점점 교내에서 그와의 동행에 익숙해져 있었다.

서호와 같이 다니지 않을 때는 화장실에 갈 때라는 사실이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자 이진은 점점 속이 홧홧해짐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난데없이 서호와의 관계에 대해 예의 차리지 않고 질문을 던지는 두 여학생에게 그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싶은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해명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권서호와 같이 어울려 다니는 것이 무슨 잘못이 되는 것인지. 혹은 권서호가 누군가와 같이 다니는 것이 이렇게 주목을 받을 정도인지 의문이 들었다.


“근데 그걸 내가 왜 설명해야 하지? 내가 권서호랑 다니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 뭐?”


이진의 날 선 대답에 두 여학생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눈을 꿈벅거리며 빠르게 시선을 교환하던 두 여학생의 입에서 동시에 어이없음의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걸 몰라서 물어?”


얼굴이 더 하얀 여학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이진은 대답 없이 그 여학생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해 보였다. 얼굴이 하얀 여학생의 입술에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무당 딸인 너랑, 강진고 프린스 권서호랑 그림이 되겠냐고.”


강진고 프린스.

그 유치 찬란한 단어들의 조합을 듣자마자 이진의 입에서 본능적으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 무당 딸이라 소문난 자신과 집안도 빵빵하고 반장에 공부도 잘하는 권서호가 한 프레임에 담기기엔 채도 차이가 좀 나긴 하지.


핏, 하고 비웃듯 웃는 이진의 반응을 보며 다른 여학생이 끼어들었다.


“너. 권서호가 좀 끼고도니까 뭐라도 된 거 같나 본데. 착각하지 마. 주제를 알아야지.”

“글쎄. 네 남자 친구는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거 아니?”


대뜸 이진이 여학생에게 남자친구라는 단어를 꺼내며 묻자, 그녀의 볼이 살짝 떨렸다. 그 옆에 선 얼굴이 좀 더 하얀 학생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진은 어버버거리고 있는 얼굴이 좀 덜 하얀 학생에게 착 가라앉은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조심해. 올해 너 이별수가 있어.”


그리고는 옆에 선 채 눈만 꿈벅거리고 있는 얼굴이 좀 더 하얀 여학생에게 낮은 음성으로 덧붙였다.


“넌 교회 다니는 그 오빠 그만 따라다니고. 그 오빠 여친 있어.”


이제는 입을 쩍 벌리고 놀라서 이진을 바라보는 두 여학생의 반응을 감상하며 이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몇 번 교내에서 지나칠 때마다 항상 그 여학생 둘 중 얼굴이 좀 더 하얀 학생은 짝사랑하던 교회오빠의 얘기만 가득했고, 다른 여학생은 남자친구가 요즘 무신경하다며 하소연이었다.

그 교회오빠가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은 순전히 이진이 넘겨짚은 것이지만.


두 여학생들은 교내를 걸어 다니며 군데군데 퍼뜨려놓은 본인들의 사생활은 생각도 나지 않는 듯 이진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키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 그대로였다.

이진은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이런 식으로 스스로 이용한 것에 대해 자괴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이렇게라도 이 두 여학생들에게 자신을 모욕한 것에 대해 소심한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때 계단 아래쪽에서 교복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올라오던 서호가 이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서호도 이진을 발견하고 반가운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진은 그때만큼은 서호가 얄미웠다.

지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자신에게 이런 수모를 겪게 하는지.


이진은 시선을 내려 서호를 노려보았다가 맞은편의 두 여학생에게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권서호가 나 따라다니는 거야. 너희들이야 말로 착각하지 마.”


영문도 모른 채 이진의 날 선 눈빛을 받은 서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진은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그에게서 돌아서 교실로 걸어갔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자습시간.

다음 주 열릴 교내 체육대회에서 각자 출전할 경기 종목을 정하느라 분주한 분위기 속에 이진은 턱을 손에 괸 채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까 걔네들한테 마지막 말은 하지 말걸 그랬나.


괜히 자존심을 세우려 헛된 소리만 덧붙인 것 같은 후회가 밀려오고 있었다.


“자 그럼 얼추 정해진 거 같은데. 출전하는 종목 안 정해진 게 누구 남았지?”


부반장 혜민이 출석부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권서호. 그리고 윤이진. 두 명 남았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어지자 정신을 차린 이진이 고개를 칠판 쪽으로 돌렸다. 교실 앞쪽에 선 서호는 칠판에 쓰여있는 종목별 출전 인원을 바라다보며 고민에 빠진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권서호는 올해도 계주 나갈 거지?”


혜민이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서호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진은 제일 만만한 발야구나 피구 명단에 이름을 넣어달라고 말할 생각으로 슬그머니 손을 들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랑 윤이진 계주에 넣어줘.”


일순 눈이 휘둥그레진 이진이 서호를 바라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혜민도 무슨 말이냐는 듯 대답 없이 서호를 쳐다보았다. 교실 안의 다른 학생들도 힐긋거리며 이진을 돌아다보았다.


“윤이진이 3번 주자. 내가 마지막 주자할게. 지난번에 보니까 윤이진 잘 달리더라. 계주가 1등 상품 제일 센 거 알지? 우리가 1등 먹여줄게.”


서호는 정작 이진의 반응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위풍당당한 표정을 얼굴에 만연히 드러내보였다.


“…아, 아니 나는.”


이진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서호는 검은 보드마카를 들어 화이트보드 칠판에 써진 체육대회 마지막 종목 계주의 옆에 이진과 자신의 이름을 큼지막하게 써넣었다.


“이진이가 달리기를 잘해? 몰랐는데?”


혜민이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이진을 바라보았다. 이진은 이상하게 그녀의 희망 섞인 얼굴을 마주하자 차마 거부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다만 이진은 턱에 힘을 바짝 주며 서호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괜히 모르는척 서호는 이진의 아연실색한 표정을 여유롭게 바라보며 입꼬리를 주욱 올려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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