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어깨 나의 무릎

10화

by 안스

현관문을 열자 온갖 살림살이들이 난장판이 된 바닥이 이진의 눈에 들어왔다. 냄비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옷가지들은 널브러져 있었다. 조그만 TV는 장판 위에 머리를 박고 있으며 찬장 위에 올려둔 책 몇 권, 화분 두어 개, 먹다 남은 과자봉지는 원래의 모습을 찾기 힘들 만큼 산산조각 나고 찢겨있었다.


슬리퍼를 벗기 전, 자신 앞에 펼쳐진 아비규환을 지우기라도 할 것처럼 이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불과 몇 시간 전 이 작은 집구석에서 펼쳐졌던 실랑이를 떠올리자 이진은 다시금 멱살 부근이 얼얼하게 쓰라렸다.


며칠 전 울음을 끄억 거리며 혜숙을 붙잡고 울던 그 아주머니의 남편이란 사람이 난데없이 찾아온 것이었다. 이진은 라면을 끓여 먹기 위해 냄비에 물을 받던 중이었고, 쾅쾅쾅하고 철제 현관문을 발로 차는 소리에 당황한 이진이 누군지 물으며 문을 연 것은 대단한 실수였다. 하필이면 혜숙도 자리를 비운 상황에.


잠금장치를 풀자마자 문틈 사이로 우악스러운 사내의 손이 비집고 들어오더니 가녀린 이진의 멱살을 대뜸 잡았다. 얼마나 들이마셨는지 소주냄새를 풀풀 풍기며 거동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비틀거리던 50대의 남성은 자신의 와이프 이름을 불러제끼더니 여기 숨어있는 거 다 안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온 집안을 다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네년들이 자신의 와이프를 숨겨준 거 다 안다며, 안 그래도 이 집에 드나들며 돈 갖다 바치는 꼴을 벼르고 있었다고 남자는 술기운에 받쳐 악다구니했다.


그만하라고, 경찰을 부르겠다는 이진의 외침에 불현듯 돌아서서 그녀를 노려보던 사내의 눈빛은 이미 제정신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 이진의 멱살은 다시 잡혔고, 만취한 남자의 컨트롤 불가한 악력은 대번에 이진의 몸을 TV로 날렸으며 그 바람에 이진은 어깨를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져 입술이 찢어졌다.


남자가 다시 한번 아주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혜숙의 방으로 들어설 때에야 그 틈을 타고 이진은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어디 가냐는 욕이 섞인 남자의 고함이 이진을 쫓아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몇 백 미터 골목을 냅다 달음박질치던 이진은 결국 골목 끝에서 튀어나온 차에 부딪히기 전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앞다퉈 삐져나오는 가쁜 숨을 정리하며 주체할 수 없이 몸이 오들오들 떨려오는 와중에 차에서 내려 자신의 팔을 잡아준 것은 바로 서호였다.


이진은 부끄러웠다. 하필이면 그런 상황의 자신을 마주하게 한 것이.

수치스러웠고, 쪽팔렸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불우한 자신의 처지가 단번에 들통난 것 같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몇 분 전까지는 술 취한 남자에게서, 지금은 자신을 걱정하는 서호에게서.


그런 자신의 마음을 용케 읽었는지 곧바로 서정이 그 사이를 파고 들어왔다. 이진은 본능적으로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혓바닥까지 덜덜 떨려올 정도로 온몸을 후들거리고 있던 이진은 간신히 서정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살려달라고. 나 좀 숨겨달라고.


그리고 서호의 집에 도착했다. 서정의 방에 가만히 앉아 이진은 어깨를 움츠려 양팔을 모았다. 더듬더듬 있었던 일을 내뱉는 이진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던 서정은 이진의 등을 몇 번 다독여주었다. 서정의 휴대폰을 빌려 혜숙에게 전화까지 마친 이진에게 서정은 좀 쉬고 있으라고 말하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밖에서 들려왔고, 이진은 시선을 들어 서정의 방을 둘러보았다.


가지런히 정돈된 침대. 따스한 분위기의 벽지. 한쪽 벽면에 위치한 책장 가득 꽂혀있는 각종 책들. 평범한 대학생의 방 같았다. 동시에 자신이 항상 꿈꿔왔던, 언젠가 자신의 방을 꾸밀 수 있게 된다면 꼭 이렇게 꾸며야겠다는 상상만 해오던 그 방 한가운데에서 누군가에게 해코지당해 입술이 찢어진 채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이진은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꾸역꾸역 눌렀다.


이진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발가락을 바라보았다. 흙먼지가 잔뜩 묻어 검은 때가 묻어있는 발바닥과 발톱 끝을 보자 문득 여기 이곳에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는 권서호가 있었다. 지금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면 혹시 그 술 취한 남자와 다시 마주칠 가능성이 없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서호의 집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끈질기게 자신의 몸에 붙어있던 불행이 기어코 이런 식으로 수모를 당하게 할 줄이야. 이진은 아주 살짝, 억울했다.


감았던 눈을 뜨자 난장판인 집구석은 당연히 그대로였다.

이진은 슬리퍼를 벗고 깨지고 쏟아진 화분과 컵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가서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문을 잠그고 나서야 힘이 풀려 문에 기대 주저앉은 이진은 무릎을 모아서 고개를 그 사이에 묻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텅 빈 위장이 눈치도 없이 꼬르륵거리며 살포시 잠이 들려던 이진을 깨웠다.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을 창문 너머 가로등 불빛이 어스름하게 비추었다. 이진의 시야에 문 옆에 내려놓았던 도시락통과 약봉투가 들어왔다. 고민하는 듯 한참을 그것들을 쳐다보던 이진이 이내 결심한 듯 도시락통을 힘겨운 손길로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패브릭 가방 지퍼를 열고 그 안에 들어있는 보온 도시락통을 꺼내자,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미지근한 느낌이 이진의 손을 타고 전해졌다. 남색의 도시락통을 천천히 열던 그녀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식탁도 없이 앉은자리에 바로 꺼내놓은 도시락통 속에는 따뜻한 잡곡밥과 소불고기, 애호박 전, 계란말이 등이 가지런하고 푸짐하게 담겨있었다. 못해도 2-3인분은 되어 보이는 양에 이진은 도시락을 눈앞에 펼쳐놓고 막상 먹지는 않고 그것들을 쳐다보았다.


급하게 싼 것치고는 혜은은 도시락을 싸는 일이 손에 익었는지 통 안에 자리 잡은 반찬들은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권서호는 이런 걸 자주 먹는구나.

새삼스레 이진은 서호 가족의 식탁과 무장아찌와 쉬어빠진 김치만 들어있는 자신의 냉장고가 비교되었다.


이진은 손을 뻗어 계란말이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작게 우물거리던 이진은 꿀꺽 삼키고는 다시 예쁘게 담겨있는 애호박 전을 들어 한 입에 집어넣었다. 이진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자꾸자꾸 눈물이 삐져나왔다. 눈물이 목구멍을 계속 막았다. 그럼에도 이진은 먹는 걸 멈추지 않았다. 도시락통에 같이 담겨있던 수저를 꺼낸 이진은 한 숟갈 크게 밥을 퍼서 입안 가득 욱여넣었다.


남김없이 먹겠다고. 오늘만큼은 절대 남기지 않고 다 먹어버리겠다고 이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천천히 이 모든 것을 다 소화해 버리겠다고 그녀는 각오했다.




주말이 지나고 화창한 날씨의 월요일 오전.

수업은 시작 전이었고, 서호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배영과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어느샌가 그의 옆에 다가온 이진이 불쑥 도시락통을 서호 앞에 내밀었다.


“다 먹었어? 어때. 울 엄마 솜씨 좋지?”


토요일에 있었던 일은 일부러 꺼내지 않으려는 듯 서호는 도시락통을 받아 들며 미소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진이 주섬주섬 말을 덧붙였다.


“… 잘 먹었다고 전해드려줘. 설거지는 깨끗하게 했고, 빈 통을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같아서 그냥 간단하게 뭐 좀 담아왔어. 같이 전해드려 줘.”


이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호는 패브릭 가방 지퍼를 열어 도시락통을 꺼냈다. 당황한 이진의 눈빛이 흔들리며 그의 손을 막으려 했지만 서호의 팔 힘을 저지하기에 이진의 힘은 너무 보잘것없었다.


“뭔데? 맛있는 거?”


도시락통을 열자 한쪽에는 방울토마토가 가득 들어있었고, 다른 쪽에는 싸구려 홍삼 젤리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민망한 듯 이진은 얼굴을 붉혔다.


“뭔데? 권서호가 왜 윤이진한테 도시락을 싸줬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옆에서 배영이 기웃거리며 물었다. 서호가 아무 말없이 도시락통을 내려다보고만 있자, 이진은 눈을 크게 뜨며 자신도 모르게 서호의 반응을 살폈다.


너무 보잘것없었나.


자신의 주머니 형편이 들킨 듯 이진이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순간, 서호의 손이 방울토마토를 향해 뻗더니 두세 개를 집어 들어 꼭지를 똑 떼고 입에 넣으며 헤벌쭉 웃었다.


“너 우리 엄마 방울토마토 귀신인 거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서호는 옆 칸에 들어있던 홍삼 젤리 쪽으로도 손을 뻗어 하나를 집더니 봉지를 죽 뜯어 입에 넣었다.


“우리 엄마 홍삼 없으면 못 사는 것도 어떻게 알았지? 야, 이거 벌써 힘나는데.”


싸구려 홍삼 젤리를 입 안 가득 우물거리며 서호는 만족스러운 듯 이진을 향해 웃었다. 그 옆에서 배영이 눈치를 살피더니 도시락통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서호는 배영의 손등을 찰싹 때리며 손길을 저지시켰다.


“고배영. 어딜 손대지?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쓰읍. 엄마한테는 내가 잘 전해줄게.”


서호는 다시 도시락통 뚜껑을 닫았다. 서호의 리액션에 이진은 민망한 듯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서호는 입 안 가득 퍼지는 달달한 홍삼 향을 오래도록 느꼈다.


주말 내내 고민했으리라. 저 아이의 주머니 형편 상 제일 푸짐하게 채울 수 있는 것으로 고르느라 고심했으리라.


서호는 갑자기 이진이 안쓰러웠다. 때마침 수업 시작종이 울렸고, 이진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도시락통을 가방에 집어넣는 서호를 보며 배영이 물었다.


“뭔데. 너네 둘 무슨 일이 있었는데.”

“배영아.”

“어.”

“나는 쟤가 왜 저렇게 안쓰럽고 귀여울까.”

“어쩔시구. 그러다가 너 큰일 난다. 사람이 불쌍하고 동시에 귀여우면 끝이야 인마.”


서호는 이진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떨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덧붙인 말은 배영에게 건넨 말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더 가까웠다.


“글쎄. 이제 시작인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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