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노란 우산 위로 비가 떨어지며 투둑투둑 소리를 냈다. 교문을 나설 때까지 서호와 이진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호는 한 번씩 시선을 내리며 이진의 표정을 살폈지만, 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만 보며 앞으로 걷고 있었다. 서호의 얼굴에는 고민이 떠올랐다. 이대로 아무 말없이 약국까지 주욱 걷기만 해야 하는 건지, 아무 말이라도 꺼내야 하나 싶어 입술을 달싹거리려 할 때, 빗소리 사이로 이진의 목소리가 먼저 비껴 들어왔다.
“넌 나 안 무서워?”
“… 네가 무섭냐고? 전혀.”
오히려 귀염상인데. 하고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서호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나 무당 딸이잖아. 애들은 나더러 무섭다고 그러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의사 아들은 다 똑똑하고, 판사 아들은 다 정의롭게?”
“… 그래도 나랑 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야.”
다시 한번 방어적인 말을 내뱉은 이진의 체념 섞인 얼굴을 내려다보던 서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정작 그런 말을 꺼낸 이진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전학생으로서 네게 받는 호의는 오늘까지만 할게. 내일부터는 나 신경 쓰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
“….”
서호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잠깐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본 이진은 애써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른 뜻은 없어. 굳이 말하자면, 나는 걸어 다니는 불행이거든.”
“….”
“내 몸에는 얇은 불행이 발라져 있어. 그래서 나를 스친 사람들한테는 그게 잘 묻어. 통계적으로 말이야. 우리 엄마도 그랬고, 지난 친구들도 그랬고. 너도 나랑 같이 다니면 금방 불행이 묻을 거야.”
“흠. 그렇다면….”
예상외의 답이 서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이진은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하는 제스처를 보이던 서호는 단번에 표정을 지우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진의 눈을 마주했다.
“별로 상관없겠는데? 내 별명은 걸어 다니는 네 잎클로버거든.”
자신의 말에 당황함이 얼굴에 점점 번지는 이진을 계속 내려다보며 서호의 빙긋 웃음 지었다.
“진짜야. 우리 엄마가 누나 낳고 나서 7년 뒤에 기적적으로 내가 태어났거든. 내가 번호 찍어서 우리 삼촌 로또 3등 당첨된 적도 있다? 보이스피싱 당하려던 할머니 구해준 적도 있어.”
“….”
“내 몸에는 행운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너한테 붙은 불행은 오히려 티도 안 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느리게 걷던 이진의 걸음이 멈추었다. 백팩 어깨끈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던 이진의 고개는 빗물이 찰방찰방 넘치는 바닥으로 향했다. 그녀가 신고 있던 낡은 컨버스 앞코가 빗물에 젖어 맨들맨들거렸다.
따라 걸음을 멈춘 서호는 동그랗고 까만 이진의 뒤통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단호한 각오가 비쳤다. 이내 고개를 든 이진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서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주 작은 떨림이 섞여있었다.
“나한테 왜 잘해주는 건데?”
“… 그거야.”
서호의 시선에 촉촉해진 이진의 눈빛이 들어왔다. 세차게 내리던 빗물이 그녀의 두 눈동자에도 튄 듯 어느새 이진의 두 눈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진의 질문에 어떤 답변을 꺼내야 할지 서호는 머뭇거렸다. 잠깐 꾹 닫고 있던 그의 두 입술 사이로 결국 흘러나온 말은 이진의 마음속에 더욱 빗물이 번지는 것 같은 파동을 일으켰다.
“이상하게 너는 프레임을 벗어나더라고.”
“… 그게 무슨 말이야?”
“예상이 안 될달까. 그래서 궁금해. 너란 애가.”
“….”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주는 호의를 그냥 한 번 받아봐. 나도 이런 적이 처음이라 앞으로가 궁금해지네.”
묘한 미소를 입에 올린 서호의 얼굴에서 따스한 다정함이 느껴졌다. 이진은 떨리는 눈빛을 애써 감추려 대답대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멈추었던 발을 움직여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그녀의 속도에 맞추어 서호도 느리게 걸었다.
서호가 말했던 약국 건물에 거의 다다르자, 그는 뒤로 메고 있던 크로스백으로 오른손을 뻗어 그 안에서 파란 3단 우산을 꺼냈다. 그의 손에 들려 나오는 우산을 황당한 표정으로 보던 이진이 서호를 보았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서호는 쥐고 있던 이진의 노란 우산 손잡이를 그녀에게 건넸다.
"사실 나 우산 있었어."
"… 너, 참 희한하다."
아무렇지 않게 우산을 펼치는 서호를 바라보던 이진의 입에서 어이없어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들은 서호의 입에서 본능적으로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서호에게 희한하다고 말을 내뱉는 이진이 그는 더욱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 나는 네가. 너는 내가. 서로가 이렇게 희한하다니. 서호는 생각보다 앞으로 재밌는 일이 많이 일어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왜 웃어?"
"아니, 그래. 희한하지. 참 희한해."
멈추지 않고 실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통제하려 입가를 손으로 문지르며 서호는 표정을 정돈했다. 한 뼘 거리를 띄우고 두 개의 우산 아래에 서 있는 둘의 사이는 아주 조금 더 가까워진 듯했다. 아직도 입가에 걸려있는 서호의 웃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바라보는 이진을 향해 서호는 기다란 다리를 뻗어 그녀의 컨버스 앞코에 자신이 신고 있던 같은 남색 컨버스 끝을 장난스럽게 툭 부딪혔다.
"봐봐. 우리 신발도 같다? 이건 벌써부터 내 행운이 너한테 붙었다는 증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두고 봐. 앞으로도 증거를 차고 넘치게 찾게 될 거니까."
"…."
"주말 잘 보내고. 다음 주에 보자."
이진을 마주 보며 인사를 건넨 서호는 뒤를 돌아 약국을 지나쳐 걸어갔다. 어느샌가 빗줄기는 제법 가늘어져 있었다. 서호가 툭 건드리고 간 컨버스 앞코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진은 느리게 눈을 꿈벅거렸다.
우산을 탈탈 털고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이진은 안방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다. 조용히 신발을 벗은 이진은 소리 나지 않게 발 끝으로 걸으며 자신의 방 문을 열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연을 끊어야 해요. 지금은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 자식과는 천륜이지만, 남편 하고는 인륜이니까. 강하게 마음을 먹어야 해."
"흐윽."
며칠 전 왔었던 아주머니가 또 왔나 보다. 혜숙을 붙잡고 우는 듯 끄억거리는 울음소리가 이진의 방문 앞까지 길게 늘어졌다. 살며시 방문을 닫은 이진은 가방을 벗고 문 앞에 기대앉았다. 다섯 번의 전학을 하면서 대한민국 여기저기 연고도 없이 참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때마다 이진이 가슴속으로 다짐했던 것은 딱 하나. 싸구려 친절에 넘어가지 말자는 것이었다. 가난한 집의 예쁜 아이. 그것이야말로 남자들이 제일 쉽게 보는 부분이었다.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주면 혹해서 넘어오리라는 남자들의 어이없는 예상을 조소하며 이진은 한 번도 쉽게 친절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서호의 다정함은 이제껏 이진이 겪어왔던 값싼 친절과는 느낌이 달랐다.
"… 후."
한숨을 작게 내쉰 이진은 무릎에 얹어져 있는 자신의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우산을 건네받으며 잠깐 스쳤던 서호의 따스한 감촉이 아직까지 연하게 남아있는 것 같았다.
"이진아. 밥 먹자."
"네."
아주머니가 돌아가고, 부엌에서 밥상을 차린 혜숙이 이진을 불렀다. 작은 식탁에 마주 앉은 둘은 말없이 입에 밥만 집어넣었다. 장아찌 두어 종류와 된장찌개, 그리고 도시락 김. 반찬은 단출했다. 젓가락으로 밥알을 조금씩 집어 입에 넣는 이진을 힐끔거린 혜숙이 침묵을 깨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팍팍 먹어라. 안 그래도 삐쩍 마른 아가. 지 엄마 닮아서 깨작거리고 있노."
"…네."
"… 엄마한테서는 아직 연락 없나?"
"…네."
"딸내미 맡겨놓고 3개월이 넘게 연락도 없고.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었으면 연락이 왔겠죠."
감정이 담기지 않은 이진의 말은 식탁 위에 놓인 무 장아찌처럼 바짝 말라있었다. 이진의 얼굴을 다시 힐끔 쳐다본 혜숙은 이진의 마지막 말을 무시하며 화제를 돌렸다.
"… 내가 내일부터는 집에 없을 거다. 요 며칠 기가 다해서 강원도 가서 기도하고 올 거니까. 주말 동안 문단속 잘하고."
"네."
"테레비 옆에 돈 올려놓을 테니까 밥 거르지 말고."
"네."
"이진아."
혜숙의 잔소리에도 계속 밥알을 깨작거리던 이진의 젓가락이 혜숙의 부름에 멈칫했다. 고개를 들어 혜숙을 바라본 이진은 가만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혜숙은 식탁 위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 친구 정은의 딸 이진을 바라보는 다정한 이모의 표정이 담겨있었다.
"니는 절대로 네 엄마랑 내 팔자 닮으면 안 된다."
"…."
"니는 크게 될 거다. 손재주로 이름을 떨칠 거란 말이다. 알겠제."
"네."
이진은 작게 대답했다. 이진의 말갛고 하얀 얼굴을 바라보는 혜숙의 표정에는 어느샌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기웃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