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어깨 나의 무릎

7화

by 안스

다음날에도 여전히 하늘은 짙은 먹빛으로 가득했다. 이진은 왼 손에는 서호가 빌려준 검은 장우산을, 다른 손에는 자신의 노란 장우산을 쥔 채 학교로 향했다. 교실에 들어섰을 때는 아직 서호는 등교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옆자리로 살며시 걸어간 이진은 그의 의자 옆에 검은 장우산을 기대놓았다. 서호가 등교했을 때 직접 보고 우산을 건네는 것이 예의였지만 굳이 그렇게 대면해서까지 감사를 치르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한 거리감. 그것이 지금 이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수업 시작 전 화장실에 다녀온 이진은 어느새 자리에 앉아 배영과 장난을 치고 있는 서호를 발견했다. 젖은 손을 교복 치마에 슬며시 닦으며 서호의 자리를 힐긋 쳐다본 그녀의 눈이 잠깐 놀라 동그래졌다. 멈칫, 하고 서있는 이진을 곧바로 발견한 서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진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어젠 잘 갔어? 내 우산은?”

“…어. 그게. 내가 아까 네 자리에 가져다 놓았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오니까 아무것도 없었는데?”

“아, 아니 진짜로 내가 너 의자에 기대놨었어.”


당황하며 어버버거리는 이진의 달뜬 표정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서호의 표정에 의문이 담겼다. 이진은 교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서호의, 정확히 말하자면 배영의 것인 우산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몇 분 사이에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분명 서호의 의자 옆에 얌전히 갖다 놓았던 우산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부, 분명히 저기 놨었는데….”


재차 더듬거리며 손짓으로 서호의 자리를 가리키며 결백하다는 표정으로 이진은 서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던 서호의 눈길은 여전히 자신의 크로스백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의자를 향해 있다가 다시 이진을 향해 몸을 돌리며 팔짱을 꼈다. 그의 입에서 체념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훔쳐갔나 보네. 어쩔 수 없지 뭐. 괜찮아. 이따가 집에 갈 때 비만 안 오면 돼. 신경 쓰지 마.”


혀 끝을 탁 차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서호의 표정을 바라보던 이진의 얼굴에 당혹감과 미안함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걸 어쩌지, 똑같은 걸 사줘야 하나. 그러니까 어제 괜히 우산을 빌려가지고 이 지경을 만들었네. 자책과 후회가 이진의 마음을 혼란하게 뒤섞었다.


자리로 돌아가던 서호의 표정을 가만히 보던 배영이 그에게 속삭이며 물었다. 첫 교시 수업 시작 전 시끌벅적한 학생들의 소음 때문에 배영의 목소리는 이진에게까지 닿지는 않았다.


“왜? 무슨 일인데?”

“고배영. 어제 내가 빌린 우산, 아까 내가 2반에 꽂아놨으니까 이따가 집에 갈 때 가져가.”

“내 우산을 왜 거기 갖다 놔?”

“말하자면 길어. 이 형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거니까 토 달지 말고 그런 줄 알아 인마.”


상체를 배영에게로 바짝 숙이며 중얼거리는 서호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장난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배영은 그저 입 밖으로 헛바람을 내뱉으며 서랍에서 첫 교시 수업 교과서를 꺼냈다.




하루 차이로, 아니 철진이라는 인물의 등장은 이진에게 가히 큰 영향력을 가했다. 어제 그렇게 환대하며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몇몇 여학생들은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이진만 쏙 빼놓고 자기네들끼리 급식실로 내려갔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던 듯 이진은 슬그머니 의자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교실 뒷문을 향해 걸었다.


“… 오늘 메뉴는 닭갈비고요.”

“거기에 요구르트까지. 좋다.”


자신의 두 어깨를 뒤에서 살짝 받치며 앞으로 밀어주는 손길에 깜짝 놀란 이진이 고개를 홱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어깨에 계속 손을 올리고 있던 서호가 눈을 꿈벅거리고 있는 이진을 향해 내려다보며 잠깐 다정한 미소를 올렸다. 그 뒤를 배영이 장난스럽게 따라오고 있었다.


“… 나 신경 쓰지 마. 너네끼리 먹어.”

“근데 인간적으로 요구르트 한 개는 너무 야박하지 않냐 배영아?”

“그렇지. 딱 두 모금이면 끝나는데. 사이다까지 당겨줘야지.”

“역시 척하면 고배영이지. 매점은 네가 쏴라.”

“왜 얘기가 그렇게 흐르지?”


몸통을 뒤로 빼며 서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던 이진의 행동은 단박에 다시 급식실을 향해 앞으로 홱 돌리는 그의 억센 손길에 무의미해져 버렸다.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배영과 서호는 둘이서 도란도란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진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적당한 거리감. 이진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던 방법은 이미 서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이진과 서호, 배영. 이 셋이 급식실에 나란히 등장해 밥을 같이 먹고 매점에서 간식까지 사 먹는 모습을 보이자 이진을 경계했던 아이들의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당 딸과 이 지역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치과의사 아들인 권서호. 그리고 체인점만 여러 곳을 둔 국숫집 아들 고배영의 연결고리를 잇지 못한 듯했다. 쟤네가 원래 저렇게 친했어? 하루 만에 저렇게 붙어 다닐 만큼 친해질 계기가 있었나? 급식실과 매점, 복도 등 셋이 여기저기 나타날 때마다 멀리서부터 그들을 기웃거리는 시선을 이진이 모를 리 없었다. 다소 불편하게도 느껴지는 시선에 거북스러웠던 이진은 모든 수업이 끝나자마자 냅다 가방을 들고 얼른 교실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1층 현관으로 내려온 이진이 비가 내리는 하늘을 발견하고 자신의 노란 장우산을 펼치며 운동장으로 나서려는 그때,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서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걔. 우산 잃어버려서 없을 텐데. 오늘 집에 어떻게 가는 거지? 괜스레 올라오는 걱정과 불안함에 아랫입술을 까득 베어 물며 발걸음을 주저하던 그녀의 시선에 교복 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끼고 휘적휘적 걸어오는 서호가 벌써 보였다. 배영은 어디로 갔는지 그의 주변에 보이지 않았고, 전날처럼 다시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현관으로 다가오는 서호의 표정에 착잡함이 스쳤다.


“…아. 나 우산 잃어버렸는데.”

“… 이거 써.”


자신을 발견하고 우산을 다시 접으며 망설이던 이진을 발견하자 서호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하며 곧장 그녀의 옆으로 다가섰다. 이진은 자신의 노란 우산을 서호에게 건넸다.


“내가 그렇게 예의가 없는 놈은 아니야.”

“그럼 여기 앞에 편의점에서 우산 하나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

“됐어. 비 그칠 때까지 기다리지 뭐.”

“….”

“안 그치면 뭐 집에 내일 가고.”


의도적으로 이진이 했던 말을 다시 입에 올리며 장난기 섞인 농담을 던지는 서호의 표정을 바라보던 이진의 입에서 어이없는 헛바람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소에 더 가깝긴 했지만, 처음 보는 이진의 웃음에 서호의 입꼬리가 위로 죽 올라갔다.


“그럼 밑에 약국 있는 골목까지만 같이 가줘.”


서호가 이진을 향해 반 발짝 더 다가오며 제안했다. 손 끝으로 우산 손잡이를 문지르며 잠깐 망설이던 이진은 이내 결심한 듯 현관 바깥을 향해 우산을 펼쳤다. 쓱 미소를 짓던 서호는 냉큼 그녀의 작은 우산 안으로 쏙 들어가며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건 내가 들게.”


서호가 둥그렇게 휘어져있는 우산 손잡이를 잡는 동시에 이진의 하얗고 차가운 손이 그 틈 사이로 빠져나왔다. 잠깐이었지만 물기를 머금은 둘의 손이 스쳐 지나갔다. 이진은 그 순간 서호의 손이 꽤 따뜻하다고 느꼈고, 서호는 이진의 손끝이 시리다고 생각했다. 둘이 느꼈던 첫 감촉의 온도는 꽤 차이가 났지만. 원래 그런 온도 차이 속에서 태풍이 만들어지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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