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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파즈 Mar 08. 2020

나는 당신을 봅니다.

에세이 #39

영화 아바타에서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나비족을 향한 주인공의 시선이 정복의 대상에서 공존의 대상으로 바뀌는 시점입니다. 


자연스럽게 관객의 시선도 나비족을 지지하고 지켜야 할 중요한 대상으로 인지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제이크는 그때부터 나비 종족이 먹고, 자고, 성장하는 과정을 거치며 재사회화됩니다. 




사람을 만나고 관계가 쌓이며 관계 자체가 지루한 순간이 옵니다. 대화는 싱겁고 만남이 끝나고 돌아온 집에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기쁨은 사라지고 스트레스만 지고 온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함께하는 시간 동안 나눈 눈빛, 제스처, 앉아있는 모습, 뉘앙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기 급급한 대화를 나누고 온 날이면 더 그렇습니다. 


마음이 바삭바삭 말라가고 관계 자체가 지루함을 넘어 질리기 시작하는 그즈음.


'사람을 온전하게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한 사람을 내 마음속 호수에 풍덩 넣어 흠뻑 젖을 만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애초에 이런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이 마음속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같은 선 위에 같은 신발을 신고 걷는 관계도 쉽지 않음은 동일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말과 비슷하지 않을까?


예수님은 '눈은 마음의 등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타인을 보는 나의 눈에 마음과 감정이 있고 그것은 고스란히 전달되어 느껴지는 것이기에 눈은 곧 마음이기도 합니다. 


눈만 마주쳐도 위로가 되기도 하고 모멸감을 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인간이 한 대상을 지극히 보는 행위는 어쩌면 '사랑'이 없다면 그저 신체기관이 움직이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래서 어쩌면 사랑은 바라보는 행위 그 자체이며 무한한 공감, 즉 내가 당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고요히 바라봄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대화가 싱거울 때
분노와 상실감이 가득할 때
과장된 제스처가 불편할 때
자세가 마음에 안 들고 꼴 보기 싫을 때
말에 비꼼이 가득해 더 이상 대화가 하기 싫을 때


그럴 때도 사랑하는 이를 고요히 지켜볼 수 있는가?


따뜻하고 고요히 바라보며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


그것을 넘어서 내 눈에서 빛나고 있는 등불을 밝게 비춰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녹여 다시 따뜻하게 나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은 아닌지?


어쩌면,


내가 보고 있는 대상은 그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내 마음은 아닐까? 내 마음에 비춰 타인을 바라보고 타인을 비춰 내 마음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또한 사랑의 다른 면은 아닐까?

...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당신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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