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파즈 Jan 03. 2020

감기 걸린 딸과 찾은 소아과

아빠 육아 #06

퇴사하고 맞은 첫 번째 평일


퇴사하고 맞은 첫 번째 평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했는데 세상 쓸모없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7개월간 폭풍 성장을 거듭하던 딸이 감기에 걸렸고 열까지 높아서 병원을 가야 했습니다. 불필요한 걱정도 많은 모양입니다. 병원을 가기 전에 아기띠를 단단히 하고 워머를 덮어서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저도 꽤 두툼한 옷을 입고는 차가운 바람일랑은 어떻게든 딸이 느끼지 못하도록.


저의 배려와 상관없이 딸은 집을 나서자마자 답답함을 호소했고 약간 옷깃을 열어 얼굴을 보니 싱긋 웃습니다. 아빠를 봐서 웃는 건지 답답함이 없어져서 웃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저는 저와 눈이 마주쳐서 웃었다고 믿습니다. 병원은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금방 도착했고 아니나 다를까 온 동네 아이들은 병원에서 정모가 있는 것처럼 모여있었습니다. 예약은 애초에 되지도 않았고 무작정 대기하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니깐 감수하고 들어갔습니다. 요즘 소아과는 아빠들이 유아부터 아동까지 꽤 많이 병원에 동행합니다. 자주 가는 소아과 선생님 한 분은 최근 요 몇 년간 뚜렷하게 변하는 것은 아빠들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원에 들어가서 소아과 접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옆에 손자를 데리고 오신 할머니가 물었습니다. '우리 손자랑 비슷한 것 같은데, 몇 개월 됐어요?', '엄마는 어쩌고 아빠가 혼자 왔어?', '어디가 아파서?'를 동시에 물으셨습니다. 이제 겨우 자리에 앉았는데 저는 '7개월 지났습니다. 엄마는 이삿짐 정리가 덜 끝나서 정리하느라 서로 나눠서 제가 왔어요. 감기가 심해서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외투를 벗고 딸의 동태를 살피니 불만 가득하게 울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딸을 달래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종종 아빠들과 눈이 마주쳤는데 뭐 별다른 말을 안 했는데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착각이라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할머니는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으신지 계속 말을 붙이셨는데 제가 정신이 없어서 ㅠㅠ.


40분 남짓 기다리고 제 순서가 되었습니다. 바로 진찰을 할 수 있도록 워머도 벗기고 아기띠도 풀었어야 했는데.. 무장 상태로 들어가서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겨우 '잠시만요'라고 말하고 딸을 꺼냈습니다. 딸은 의사 선생님을 보자마자 크게 울기 시작해서 나올 때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코에 콧물을 빼니 막상 시원했는지 나와서 진정을 찾고 생글생글 웃었습니다. 그런데 뭐했다고 저의 체력이 고갈되는 느낌은 무엇인지. 저는 이미 방전 상태로 가고 있었습니다. (ㅠㅠ)


'지나간다. 다 지나간다.'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잠깐 사이 잠이 들었습니다. 완전 기절. 물티슈도 가져오지 않아 코에 콧물 자국이 남은 채로 잠든 모습을 보는데 귀엽기도 하고 한 편으로 마음이 짠했습니다. 이 쪼꼬미 녀석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게 대견하면서도 첫 번째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라. '이런 시간도 지나가야 더 크니깐. 금방 지나간다. 시간이 원래 그런 것이라 아픈 것도 힘든 것도 금방 지나간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게 첫 감기로 고생하는 딸에게 하는 말인지 퇴사하고 첫 평일을 맞은 저에게 하는 말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번도 걷지 않아 매끄러운 딸의 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