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일을 결정할 수 있게 하자
저녁 5시 반에 밥을 준비해 놨지만 첫째는 30분이 넘도록 올라올 기미가 없었다. 저녁을 먹고 쓰레기도 버릴 겸 산책을 가자고 했는데, 산책 가고 싶다던 첫째는 책에 빠져서는 밥 먹고 산책 가는 것도 다 잊은 듯했다.
몇 번 말을 해도 '알겠어~'라고만 하고는 올라오질 않았다. 그 사이 나는 밥을 다 먹었고, 거실 저편에 엎드려서 책을 보는 첫째의 등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몇 시에 올라올 거야? 여섯 시가 넘었는데? 여섯 시 반 넘으면 산책 못 가!"
"알았어, 여섯 시 십오 분 전까진 올라갈게."
뭐? 6시 15분? 책 읽으면서 밥 먹으면 한 시간도 더 걸리는 녀석이 15분에 올라와서 산책은 언제 가고 언제 씻고 언제 자냐... 싶어서 속으로 좌절하고 있었다. 일단 내 시간이라도 아끼자 싶어서 내가 먹은 것과 아침 설거지 거리를 싹 모아서 설거지를 시작하니 그제야 첫째가 느릿느릿 식탁으로 왔다. 다행스럽게도 6시 15분 전인 10분에 올라오긴 했지만 20분 만에 밥을 다 먹을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설거지를 하면서 첫째에게 말했다.
"올라왔네?"
"여섯 시 반까지 다 먹으면 되지?"
"어. 가능하면 해봐~"
그리고 설거지를 하는데 5분도 지나지 않아 내 귀에 이런 말이 들린다.
"밥 반틈 먹었다~"
"어? 벌써?"
또 5분이 지나자
"밥 다 먹었다. 반찬만 남았다."
설거지를 마무리할 때쯤 되니
"이제 반찬 하나만 남았다."
정말 놀랍게도 15분 만에, 평소의 1/4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밥을 거의 다 먹어가는 것이었다. 놀라서 첫째에게 한마디 했다.
"너, 정말 한다면 하는구나!? 대단해!"
밥 일찍 먹으라는 잔소리, 밥 입에 넣지 않냐는 잔소리가 필요 없었다. 첫째가 스스로 시간을 정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밥을 신속하게 먹는 걸 보니, 잔소리가 정말 필요하지 않구나 하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다.
중간에 큰 일 보러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시간이 늦춰지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빠르게 내 예상보다도 훨씬 일찍 저녁을 다 먹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첫째와 밤산책을 나가 목성, 토성, 직녀성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들어왔다.
제한선을 안내만 잘해준다면, 아이는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렇게 입에 밥 없다고 잔소리할 때보다도 더 빠르게 밥을 먹을 수 있는 아이였는데, 잔소리할 땐 밥을 빨리 먹지 않았던 건 밥을 빨리 먹을 필요가 없었고 스스로 밥을 빨리 먹겠다는 의지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기가 스스로 시간을 정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면, 잔소리가 없더라도 오히려 더 잘 해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여전히 아내가 없는 집에서 남자 둘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오늘만 같다면 내일도 평안하게,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2021.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