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숙함을 인정하는 일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는 일종의 성장물 휴먼드라마다.
종영한 시점부터 한 달가량 지났지만 여전히 뚜렷하게 기억이 남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포맷은 연애 예능이고 시청자들도 자연히 그렇게 인식하지만, 출연자들의 서사만을 놓고 보자면 성장물 휴먼드라마처럼 보인다. 출연자들은 저마다 고유의 미숙함을 드러냈다. 일부 출연자는 연애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관계 전반에 미숙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첫 화에서 주춤하고 뚝딱거리던 모습들은 마지막 화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층 떳떳하게 나아가는 출연자들이 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서로에게 생채기를 새기면서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종국에는 개인의 성장이라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
연애는 목적에 따라 접근 방식과 양상이 극명하게 갈린다. 단순히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워서든, 설렘을 느끼고 싶든, 결혼을 염두에 두든지 간에 연애에서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하려고 한다.
흔히 '연애를 많이 해봐야 된다'란 조언은 관계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갈 수 있기에 많이 시도해 보라는 진의가 내포되어 있다. 연애가 수단인 이 관점에서는 몇 번의 만남을 거치면 나와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기저를 이룬다. 사실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많은 선택지를 접해봐야 그중에서 가장 좋은 선택지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법이니까. 이러한 접근방식이 틀렸다는 걸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연애 횟수가 개인의 관계 성숙도와 정비례관계인 것처럼 쉽게 단정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나와 맞는 사람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해도, 일정 부분은 상대방이 그만큼 희생하고 조율했기 때문에 맞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연애란 결국 자기 자신의 성장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다음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 누군가의 연인이 된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나의 기대와 함께 종종 발생할 갈등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 나에게 있어 사랑은 무엇인지, 앞으로의 여정을 어떻게 함께 헤쳐나갈 것인지 등 관계에 대한 태도를 성찰하지 않으면 연애 횟수를 중요시하는 세태가 크게 의미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연애를 안 해도 자기 성찰은 언제든지 가능하니까.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남들은 다 하는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한 이유로 참여한 것이고 성장의 관점에서 연애를 바라보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 성찰을 통한 성장을 통해 고유의 성숙함을 품게 된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아마 출연자들의 서툴었던 모습에 집중하며 평가를 내리겠지만, 같은 모태솔로인 나는 출연자들에게서 도리어 슬라이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사랑에 대해 안일하게 여겼던 점들과 미숙했던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세간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명저라고 생각한다. 연애에서 '사랑'은 뗄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단도직입적으로 사랑이 무엇이든 간에 사랑하지 않으면 연애할 필요가 있을까? '연애를 한다'는 것과 '사랑을 한다'는 것의 차이를 한 번쯤은 숙고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사랑의 기술>에서의 단락 하나를 남겨두며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의 단상을 마무리하려 한다.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지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만이 필요하며, 그렇게 되면 그 밖의 일은 모두 저절로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태도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면서도 기술은 배우지 않고, 올바른 대상만을 고르면서 대상만 찾아내면 아름답게 그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에 비유할 수 있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