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적 차원에서 보면, 인간은 얼마든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걸 수용소 생활은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 예는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런 영웅적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은 얼마든지 무력감을 이겨낼 수 있고 좌절감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내적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한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자신이 내린 내면적 결정의 결과이지, 수용소 생활에서 받은 영향만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아무리 열악한 수용소 안에서조차도 전형적인 수감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인간성을 지켜나가는 수감자가 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보편적 의미를 묻는 것은 마치 바둑 9단한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거나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절묘한 수가 뭔지 좀 가르쳐 주실래요?”
지금 두는 바둑의 판세와 상대방의 성향과는 무관하게 언제 어디서나 먹혀 들어가는 묘수란 있을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생의 추상적 의미를 찾아서는 안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루어야 할 소명이나 사명이 있고 완수해야 할 구체적 책무가 있다. 그것은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므로 누구도 그 사람 역할을 대신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모든 상황들은 각각이 그 사람에게 하나의 도전인 것이며, 그가 풀어야 할 하나의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거꾸로 뒤집어 생각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고 물을 것이 아니라 질문을 받고 있는 쪽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는 오로지 책임 있는 행동으로만 대답할 수 있다.
건강한 정신이 지향해야 할 도달점은 균형 상태, 즉 생물학에서 말하는 아무런 갈등이 없는 '평형 상태'라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그런 오해는 매우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스스로 선택한 과업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자세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긴장을 무작정 쏟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자기 삶의 잠재적 의미를 묻고 깨닫는 것이다.
이런 비유를 들면 어떨까. 비관주의자는 매일 한 장씩 뜯어내는 달력의 두께가 얇아지는 것을 보면서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사람이다. 그와는 달리 인생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사람은 매일 뜯어낸 달력을 어제의 달력 위에 차곡차곡 쌓아간다. 물론 뒷장에는 중요한 기록을 적어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내실 있는 삶과 거기에 아로새겨진 기억을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되돌아볼 수 있다.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하고 자기 인생의 드러나지 않은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고 내가 자꾸만 되뇌는 이유는, 삶의 참다운 의미는 고립된 개인의 내면 속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자세를 일컬어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초월’이라 부른 적이 있다. 자기 아닌 무엇 혹은 타인 – 그것은 충족시켜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내가 만나는 타인일 수도 있는데 – 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때만 나도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역설이 여기에 숨어 있다.
인간은 상황의 노예도 아니고 운명의 허수아비도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상황에 굴복할지 상황에 맞설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인간은 결국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언제나 결정을 내리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