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소망을 발표하는 2020년 송년회 자리에서 하와이 세달살기를 말했더니, 왜 하와이를 그리 길게 가냐고 묻는 이가 있었다. 훌라를 배우고 싶어서라는 나의 말에 "OO 평생교육원 가면 훌라 가르쳐주는데, 하와이까지 안가도 배울 수 있어요"라고 했다. 와우! 고급정보. 이미 코로나가 만연한 터고 여름이 지나면 좀 잦아들기를 희망했지만 미래는 모를 일이므로 이런 정보는 꿀이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2021년에 해외여행이란게 얼마나 부질없는 희망이었나싶다. 하와이를 가든 못가든 훌라를 미리 배워두는 건 좋을 것 같아서 평생교육원 브로셔를 들여다봤다. 훌라댄스가 과연 있었다. 월요일 오후 1시 ~ 3시였다. 우후후. 저녁도 주말도 아니니 갈 수 있겠다. 남편에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말하지 않고도 갈 수 있다는 건 나에게 자유로움을 의미했다. 몰래하는 자유로움. 헤헤헤
쭈뼛쭈뼛 대는 마음 한 조각,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 한 조각이 섞인 채로 두꺼운 방음문을 열고 훌라수업교실로 들어갔다. 여리여리한 몸의 선생님이 보였다. 둘러앉아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훌라에 대한 소개를 들었다. 하와이는 말은 있지만 글은 없다. 우리 나라처럼 세종대왕이 있었다면 하와이말에도 글자가 생겼을텐데,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않아서 하와이말은 영어 알파벳을 빌어서 쓰고 있다. 하와이 사람들은 그들의 신화와 역사를 노래하고 전승하기 위해 춤을 추었다. 몸으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셈이었다. 선생님은 하늘, 태양, 바다, 바람, 비, 눈물, 파도, 꽃 등등을 뜻하는 동작을 소개해주셨다. 와~! 수화를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이어서 배운 스텝과 손동작은 간단해보였지만, 선생님과 똑같이 되지는 않았다. 5살에 발레를 시작해 발레를 전공했고, 스포츠댄스 학원을 10년 넘게 하다가 하와이에서 훌라댄스를 보고 마음이 치유되었다는 선생님은 10여 년동안 훌라를 열렬히 사랑하고 계셨다. 그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져서일까, 첫 수업에서부터 훌라에 마음이 폭 잠겼다.
선생님이 전달해준 하와이 음악들이 마음을 매만져주었다. 듣고 또 들어도 좋은 선율이 이어졌다. 선생님의 춤사위를 보면 이유를 모른 채 마음이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드넓은 바다, 끝없이 밀려들어오는 파도,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서우봉 둘레길에 올라 바다와 한라산을 내려다보면 한 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나의 고민들이 별일 아니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사람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의 일부가 되는 듯했다. 자연은 그저 내가 나인 채로, 있는 그대로 있어주면 된다고 말하며 나를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훌라치마도 구입하고, 아는 동생도 전도(?)해서 함께 수업에 참여했다. 그녀는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공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3월에 배우기 시작했는데 5월부터 공연이야기가 나왔다. 이렇게 속성일수가 있나? 선생님은 그냥 편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하면 된다, 걱정할 것 없다고 하셨다. 일이 아닌 공연은 즐거울 거란 기대가 일었다. 훌라 공연은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모르는 것에 대한 설렘과 기대는 나를 더 훌라 강의장으로 이끌었다.
코로나상황때문에 공연이 연거푸 연기되었다. 아직 준비가 미흡한 것 같은데 연기가 되니 은근 위안이 되었다. 9월에 예정되어 있다는 공연을 위해 여름학기에는 서귀포에 있는 선생님의 훌라스투디오에서 수업을 했다. 서귀포는 가깝다면 가깝지만, 제주 사람들은 결혼하고 나면 제사 지낼 때만 간다는 먼 곳이기도 했다. 한라산을 에둘러 가야하는 그 거리가 어마어마한데, 훌라를 추러 서귀포까지 매주 가야할 일인가 싶었지만. 딱 두 달만 가면 되니까 해보기로 했다. 서귀포를 오가는 운전을 하며 다시금 깨달았다. 제주란 역시, 감동이야. 산길로 둘러가며 숲터널을 지날 때면 훌라 '덕분에' 이렇게 좋은 길을 자주 가게 되었구나하며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길을 익히고 나니 서귀포 중심가를 지나지 않고 산록도로를 달리며 바다와 한라산을 만끽하다가 잠시 차를 세우고 전망대에 올라 풍경 사진도 찍으면서 여행자처럼 서귀포를 오갔다.
계절학기가 끝나고 훌라 수업은 금요일 오전으로 바뀐 가을학기가 시작되었다. 하와이에 가진 못했어도, 이렇게 훌라를 즐기고 춤으로 하와이를 만들어가는 거 아니겠나? 그 무엇보다, 훌라라는 춤이 나에게 주는 위안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나인 그런 순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될 수 있는지를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다. 멀리 지평선에 한치잡이 배의 불빛이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밤바다를 볼 때나, 윗세오름에 오르면서 만끽할 수 있는 제주 풍경을 볼 때나, 내 숨소리만 들리는 바닷물 속으로 잠수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자연과의 합치의 순간. 그런 순간에 느껴지는 설명하기 어려운 위로와 감동. 바다까지 가지 않아도, 산을 오르지 않아도 그 위로를 훌라를 추면서 얻을 수 있었다. 나와 훌라입학 동기분들은 지인들을 하나둘 데리고 오며 스스로를 '훌라 전도사'라고 칭한다. '이 좋은 걸 나만 할 수는 없지!'라는 마음이리라.
남녀노소 모두 출 수 있는 춤.
마음을 매만져주는 춤.
스스로를 위해 추는 춤.
내 몸이 자연이 되는 춤.
자연과 하나되는 춤.
나의 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