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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캐 탄생의 날

by 명랑소녀


10월 말 이중섭거리에 있는 서귀포관광극장.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 높은 벽면을 가득 채운 담쟁이덩쿨이 소근거리면서 발그레하게 물든 가을 날, 저녁 노을과 함께 첫 훌라 공연을 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최적의 온도에 기분이 좋아지는 보드라운 바람이 부는 저녁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아도 충만할 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오래된 건물이라서인지, 괜찮은 대기실도 없고 공연 전 연습할 만한 곳이 없었다. 화장실도 없어서 건물 밖으로 나가 관공서나 여행자를 위한 시설을 찾아 한참을 걸어나가야했다. 아주 작은 공간이 한 켠에 있어서 짐을 놔두고 차례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관계자 외 접근 금지인 계단 위 한 쪽 벽면이 문이기에 열어보니 아이돌들이 멋지게 뮤직비디오를 찍으면 근사하게 나올 것 같은 칠 벗겨진 벽들이 우리를 반겼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창문이 한쪽 벽면을 채웠다.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향기가 났다. 지하실이 아닌데도 지하실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엄청난 곰팡이들의 강력한 냄새였다. ‘우리가 여기서 연습을 꼭 해야하는 걸까?’라는 의심가득한 걱정이 들어서 발걸음을 멈추고 있는데 동기들이 우르르 들어와서 어쩔 수 없다며 줄 맞춰 서라고 했다.


주로 50대 후반 또는 60대 초반이라 나랑은 나이차가 어느 정도 있는 언니들이 나의 동기다. 동기들의 열정은 지하실같은 환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틀리지 않고 잘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가보다. 나란히 서서 연습을 거듭하다보니 어느새 공연 시간이 임박해오고, 화장실에 다녀와야할 타이밍이 되었다.


의상입고 분장한 채로 밖에 다니지 말라고 하기에 불편한 마음으로 화장실을 찾아 이중섭 거리를 헤맸다. 그러다 내 딸들을 발견했다. 근처엔 주차할 곳이 없어 멀찌감치 주차하고 걸어오는 중이었다. “현지야! 선우야!”하고 불렀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나를 못알아보는 것이다! 헐!


“엄마야, 엄마!”라고 하니, “응??? 엄마야???” 라면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딸들도 나를 못알아볼 정도면 누구도 나인지 모르겠는걸? 괜시리 마구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오늘은 원래의 나는 없는거다. 새로운 캐릭터. 훌라하는 제주의 여인. 오늘은 그게 나야. 새로운 부캐 탄생의 날이다. 더욱 가벼워진 마음으로 즐겁게 공연해야지.


어느새 공연장 자리가 꽉 찼다. 우리 동기들 모두 첫공연이라 가족들이 다 찾아왔으니 작은 공연장이 금방 차버린 것이다. 공연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대기석에 앉아있다가 차례가 되어 무대에 올랐다. 입꼬리는 절로 귀에 걸리고 마음엔 즐거운 거품이 가득 차오른 것처럼 몸이 두둥실 뜨는 기분이었다. 그 동안 살면서 했던 수 많은 공연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야외인데다 환상적인 순간. 아름다운 자연을 예찬하며, 같이 이 마음을 느껴줄 사람들이 있음에 행복했다.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나는 이제막 시작한 신입이었지만, 오래도록 춤을 춘 선배님들의 공연이 정말 멋졌다. 우리 미래의 모습이라고 동기들과 설레발을 쳤다. 두 곡의 공연을 모두 마치고, 아이들에게 꽃다발을 받고 기념사진을 많이 남겼다. 무거운 속눈썹을 떼어내고, 머리를 풀어 내리고 두꺼운 화장을 슥슥 닦아낸 후 가족들과 맛있게 흑돼지를 구워먹었다.


두 번째 공연에도 가족들이 왔었는데, 처음과 같은 설레임은 없었다. 세 번째 공연부터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가족들이 오지 않을 때 더욱 자유로운 느낌으로 즐겁게 공연을 했다. 사진찍어주는 이가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진한 화장을 싫어하는 남편의 잔소리가 없으니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다. 이제는 엄마가 공연을 한다고 해도 그런가보다하는 시들함에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나는 엄마도, 아내도 아닌 부캐의 훌라댄서로 변신해서 아름다운 제주를 만끽하는 시간을 보내는 걸 모르지롱?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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