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케이션의 중요성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한 것들..
이번 편에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어떤 것들을 준비했는지 써보고자 한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를 잘 준비할수록 많은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물론, 촬영장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다는 전제하에.
로케이션
이번 시나리오의 가장 큰 난관은 씬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장소가 많았고, 설상가상으로 야외 촬영이 많았다. 그래서 다양한 곳을 알아봐야 한다는 것부터 큰 부담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나의 자취방과 파티룸이 구해져 대관을 하는 데에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제작부 언니와 여러 곳을 다니면서 화면에 잘 담길 수 있는 로케이션을 구했다.
야외 촬영에서 가장 큰 고려 사항은 주변 소음과 조명이었다. 일단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쓰긴 하지만, 그래도 소음이 최대한 나지 않는 곳에서 촬영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한, 밤에 촬영하는 씬이 많았기 때문에 주변에 조명이 어느 정도 있는 곳이어야 했다. 열심히 찾아다닌 끝에 성미산 체육관 쪽에서 인적이 드문 산책로를 찾을 수 있었고, 상수역 부근에서 이쁜 골목길을 찾아서 촬영을 하기로 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로케이션이 중요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이야기의 현실감과 설득력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로케이션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과 이야기가 설득력을 가지게 만드는 요소이다. 따라서, 인물들이 어디서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같은 대사라도 전혀 다른 분위기와 메시지를 준다. 그러면서 관객은 자연스러운 공간을 통해 영화가 실제처럼 느껴지고, 캐릭터의 삶에 더 몰입하게 된다. 예컨대, 이번 나의 단편에서 주인공 라희는 전 남자친구 건과 어색하면서 사적인 대화를 나눠야 하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넓은 공간 대신에 차 안에서 대화하는 것으로 정했다. 관객은 두 사람이 고립된 듯한 공간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비밀스러움, 친밀감, 혹은 긴장감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어느 공간에서 등장인물이 이야기하느냐는 관객들의 몰입을 돕는다.
둘째, 영화적 분위기와 미장센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촬영지는 영화의 색감, 조명, 소품과 함께 미장센을 완성하는 핵심이다. 이는 감독이 전하고 싶은 톤 앤 매너를 장소가 곧바로 표현해 준다. 예를 들어서 <라라랜드>의 LA 도심 풍경은 꿈과 현실의 간극을, <기생충>의 반지하 집은 계급적 긴장을 상징하는 것과 같다. 조금 웃픈 이야기지만, 나는 나의 첫 작품 <모르는 사이>를 촬영할 때, 화면에 담기는 장소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그래서 나의 본가에서 촬영을 했는데, 그때 애매하게 붙여져 있는 꽃무늬 벽지가 그대로 나의 영화에 나타났다. 영화를 본 한 친구가 집이 모텔 같이 나왔다고 했다. 장소가 설득력이 없으면 영화의 집중력을 흐린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장소에 좀 더 신경 쓰게 됐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예산과 제작 현실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로케이션은 실질적으로도 중요하다. 예산이 적은 단편영화이기 때문에 접근성이 무조건 좋아야 한다. 촬영팀, 장비, 배우 동선 관리에 유리한 곳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다 계산하여 짜는 데에 애를 썼다. 또한, 세트 제작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되도록 대관료가 싼 곳이거나 대여가 필요 없는 곳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래서 일단 1회 차와 2회 차에 가장 중요한 장소를 기점으로 그 근처로 로케이션 동선을 짜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러나 최대한 많은 변수를 고려해서 동선을 짰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촬영에 내가 놓쳤던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배우들이 헤어 메이크업을 받을 곳을 못 찾았던 것이다. 1회 차 처음 시작하는 곳이 마포구청 쪽이었는데, 베이스캠프를 스타벅스 카페로 잡았다. 카페에서는 당연히 헤어 드라이기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배우들이 헤어 메이크업을 받는 곳을 찾기 위해 스태프들이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결국, 양해를 구하고 그 근처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는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던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촬영 로케이션에 대한 만족도는 꽤 높았다. 카메라 프레임에 잡힌 장소와 주인공들의 모습이 조화롭고 사랑스럽게 나왔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촬감님과 장소를 함께 보며 구도를 잡았을 때는 솔직히 큰 감흥이 있진 않았었다. 그런데 본 촬영에서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니 장소는 또 다른 세계가 되었다.
배우들은 각 장소에서 호흡하고, 감정을 느끼고, 대사를 뱉었다. 그리고 카메라도 이에 맞춰 함께 움직였다. 프레임 안에 담긴 배우들과 배경이 하나의 퍼즐조각처럼 서서히 맞춰져 갔고, 나의 이야기가 완성되어 갔다. 어떤 말로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양한 색의 온기가 장소에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당장은 실감이 나진 않지만, 꽤 시간이 지나면 내가 촬영한 장소를 다시 갔을 때 벌써부터 이 온기가 그리워질 것만 같단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