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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도 해피엔딩

<어쩌면 해피엔딩>의 박천휴 작가를 보고

by benow

엊그제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유튜브를 켰다. 연관 영상에 최근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토니상을 수상한 박천휴 작가가 출연한 나 혼자 산다 클립이 떠서 무심코 클릭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천휴 작가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 그런데 웬걸. 뉴욕 미란다 서점에서 말차 라테 한 잔을 들고 서점을 둘러보는 모습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박천휴 작가가 나온 나 혼자 산다 전편을 보고 말았다. 그 이후로 며칠간 박천휴 작가에 빠져 밥 먹을 때마다 똑같은 편을 계속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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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박천휴 작가에게 빠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곧 소개팅을 앞둔 친구랑 밥을 먹었는데, 자연스레 친구가 꿈꾸는 이상형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친구가 “나 얼마 전에 나 혼자 산다를 봤는데…”라며 수줍게 얘기를 꺼냈다. 나는 바로 “박천휴 작가?”라며 물어봤고, 친구는 “역시 아는구나”라고 답했다. 대화가 황당하긴 하지만, 친구도 어쨌든 박천휴 작가가 너무 멋있다며 열변을 토했다. 댓글창도 우리와 같은 반응이 많았다. 그의 일상에서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았다. 역시 리빙레전드인 이유가 있나 보다.


무엇이 그렇게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의 순수함과 열정에 끌렸다. 내가 인상 깊었던 장면은 그가 브로드웨이에서 <어쩌면 해피엔딩>을 떨리는 마음으로 관람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writer’s alley (작가의 골목길이라고 불리는 공연장 스탠딩석)에 서서 본인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수만 번을 봤을 작품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게 놀라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모습을 보고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 느낌이 강렬해서 잔여감정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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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애정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있는 원동력이 궁금했다. 찾아보니 <어쩌다 해피엔딩>이 브로드웨이로 진출하기까지 약 9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 작품에는 작가가 바친 청춘이 들어있던 거다. 그런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는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매번 초심자의 마음으로 공연을 보는 모습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작품을 보며 감동받는 수많은 관객들을 보니 9년의 시간이 또 다른 의미를 갖는 것 같았다. 긴 여정이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작가의 태도를 조금이나마 배우고 싶었다. 루틴이 있는 비슷한 하루 속에서 같은 작품을 보고 매번 미세한 차이를 느끼는 것. 내가 실천하고 싶은 삶의 태도다. 같은 작품은 내가 사랑하는 모든 대상들로 치환할 수 있을 거다. 지금 단편 영화 촬영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가 쓴 시나리오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반복적인 시나리오 수정이 너무 지쳤고 판단력이 흐려지기도 했다. 자연스레 수정 과정에서 재미나 새로움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 시점에 박천휴 작가의 영상은 나에게 자극제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하는 스태프들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줬다.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분들에게도 떨리는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보냈다.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던 상태라 반응이 있기 전까지는 마음이 많이 불안했다. 그런데 다행히 배우분들이 시나리오에 좋은 피드백을 주셨다. 재밌게 읽었다는 카톡 내용을 혼자서 10번 이상이나 다시 읽어봤다. 그리고 혼자서 시나리오를 썼을 때 느껴보지 못했던 찰나의 희열을 느꼈다. 나는 고작 저예산 단편 영화에서도 누군가가 재밌다는 말에 이렇게 설레는데, 박천휴 작가는 아마 내가 상상도 못 할 만큼 깊은 감동을 느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유명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거창한 꿈은 없다. 그냥 어쩌다 보니 매주 목요일 브런치 글을 연재하고, 단편영화에 필요한 시나리오를 쓴다. 정말 어쩌다 보니 무언가 이야기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이야기의 힘을 느끼게 된다. 그것 만으로도 내 삶은 조금씩 충만해지고 있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에 공감해 주고, 그 과정에서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자연스레 만난다. 이번에 가장 신기했던 건, 내가 쓴 이야기인데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많이 다르면서도 많이 닮아 있다.


이처럼 많은 작품들은 결국 사랑과 연대의 결과물인 것 같다. 감히 가늠하기 어렵지만, 박천휴 작가의 눈물 속에도 그 의미가 담겨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어쩌면 누군가의 이야기에 우리가 함께 공명하기 위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타이밍 좋게 박천휴 작가의 영상이 나에게 와서 다시 힘을 낼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꾸준히 브런치 글을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는 독자분들 덕분에 용기 내어 오늘의 글도 완성할 수 있었다. 좋은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오늘의 글은 마무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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