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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직전에 든 생각들

촬영이 다가오며 혼란했던 나의 마음에 대한 기록

by benow

촬영일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수개월 간 준비했던 모든 과정이 2회 차 촬영에 판가름 난다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특히, 촬영 일주일 전부터 체감상 시간은 두 배로 빨라진 듯했다. 그럴수록 스스로를 믿고 차분히 할 일을 해나가자고 다짐했다.


tempImageKcJyoF.heic 오늘의 브런치 글과 맞닿아 있는 오늘 요가원의 글귀

촬영 일주일 전-

연출부 회의가 있던 날이다. 사실, 이때까지도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않았다. 결말 부분이 잘 풀리지 않아서 힘들었다. 결국, 연출부 친구들을 만나 밥을 먹으면서 혼자 했던 고민들을 공유했다. 내가 어려웠던 부분은 ‘어떻게 해야 주인공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성장할까?’였다. 나는 무조건 큰 사건들을 클라이맥스에 배치하려 했는데, 연출부 친구들이 굳이 그러지 말고 주변 인물들을 활용해 보라고 했다. 역시나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다른 방식을 고민해 봤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결국 아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것이 독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나만의 생각에 갇히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이 날은 실마리가 조금씩 다시 풀리는 것 같아서 속이 후련했다. 희한하게 다시 시작하는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연출부 최고!


촬영 6일 전-

촬영 콘티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촬감님과 여러 번 만나면서 함께 구도를 고민했음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앞선다. 이때쯤에 뇌에 과부하가 다시 오기 시작한다. 시나리오가 어느 정도 풀렸다고 생각하니, 콘티가 다시 발목을 잡는다.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시작해야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올라온다. 콘티를 다시 처음부터 확인해 보려는데 뇌가 멍하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Shot deck에서 많은 레퍼런스 장면들을 취합하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작은 행동을 하다 보니 불안감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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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5일 전-

해답 초콜릿을 받았다. ‘넘겨 버려라’. 지금 뭐가 되고 있는 듯 안 되고 있는 듯한데, 그냥 넘겨 버려야겠다. :) 이쯤 되니 에라 모르겠다 마인드가 조금 올라온다. 분명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뭔가 완성되지 않은 것 같은 불안감은 왜 생기는 걸까. 아무래도 최대한 통제 가능한 상황들을 만들어서 안전하게 촬영하고 싶은 바람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촬영 4일 전-

사실 촬영 5일 전에서 4일 전으로 넘어가는 날 밤에 의상을 구하고자 홍대를 돌아다녔다. 막 문을 닫으려는 가게에 들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영화에 필요한 의상을 구했다. 구하고자 하니 구해지니까 또다시 재미를 느낀다. 갑자기 녹초가 된 마음이 활기를 찾았다. 영화의 그림이 조금씩 채워져가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덤으로 시나리오도 완성했다. 지금까지 약 14고를 쓰면서 가장 맘에 드는 결말이다.


촬영 3일 전-

원래 아역배우를 캐스팅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내 작품에 촬영하는 배우가 나보고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고 했다. 사실, 씬이 길지 않기도 하고 대사도 없어서 아이를 출연시키지 않은 채 편집으로 메꾸려고 했었다. 어느 정도 스스로 타협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냥 넘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필름 메이커스에 공고를 올렸다. 감사하게도 연락이 왔고, 촬영 3일 전 아역배우를 캐스팅했다. 어린 친구가 촬영장에 온다고 하니 갑자기 부담이 되었다. 책임감에서 오는 부담감이었다. 잠깐이지만 아이에게 좋은 촬영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고, 아직 자아가 성립되지 않은 나이이다 보니 조심스러운 부분도 많았다. 그래서 급하게 윤가은 감독의 아역배우 촬영장 수칙을 참고해 스태프들에게 공지를 하고, 함께 아이를 위한 환경을 만들자고 약속했다. 아이가 오기로 하니 몇 배로 긴장됐다.


촬영 2일 전-

촬영 스탭 회의를 했다. 일촬표를 공유하고, 2회 차 촬영의 모든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주의할 점들을 함께 공유했다. 22개의 신을 2회 차 안에 찍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스태프들에게 ‘시간 싸움’에 함께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추가 촬영이 생겨버렸지만.. 그래도 함께 노력해 준 스태프들에게 무한한 감사인사를 전한다.) 많진 않지만 지난 2편의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준비과정에서 최대한 통제 가능한 상황들을 만들어야 문제 상황 발생 시 당황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이번에는 지난번 보다 준비를 더 하고자 노력했다. 스탭 회의를 하고 함께 얘기를 나누니 나의 부담이 1/N로 나눠지는 것 같았다. 회의 때 알게 되었던 사실은 스태프들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연출의 부담감이 더 크겠지만, 이 작업이 잘 되게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스태프들을 보니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나의 스태프들을 믿기로 했다.


촬영 1일 전-

하루 종일 움직인다. 촬영에 필요한 간식 및 프린트물을 최종적으로 사야 하고, 촬영 전 마무리 작업으로 확인도 해야 한다. 혼자 했으면 힘들었을 텐데, 주인공 라희 역을 맡은 언니가 차를 가지고 와서 도와주었다. 함께 장을 보고, 고기를 먹으면서 영화에 대해 가볍게 얘기했다. 이제는 실전으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이 날은 우리가 서로를 믿고 있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 족했다. 이제 마인드 컨트롤은 각자의 몫이었다. 언니와 헤어진 다음에 최종적으로 의상 점검을 했다. 촬영 전날은 의외로 마음이 편했다.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고, 실전에서 준비해 온 것들을 해나가는 일만 남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믿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믿기로 다짐하며 잠에 들었다.


촬영 일주일 전을 복기해 보니, 촬영 2회 차를 무사히 마친 게 꿈만 같다. 요즘 신뢰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이번 촬영을 통해서 스스로를 이전보다 좀 더 믿게 되었다. 이 과정들 속에서 겪었던 불안감, 긴장감, 유대감 등이 결국 단단히 모여서 나의 내면 속에 뿌리내렸다. 그리고 스스로를 믿으니 내가 믿기로 한 사람들에 대한 신뢰 또한 두터워졌다. 스스로 의심이 들 때마다 이 과정을 기억하며 그다음을 만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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