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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의도

본래의 의도란 무엇이었는가

by benow

얼마 전, 명상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촬영이 끝나고 오랜만에 뵙는 거라 할 얘기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집 가는 길에 선생님과 이야기 나눈 내용들을 곱씹어 보았는데, 그중에서 ‘의도’에 관해 짧게 이야기했던 게 맴돌았다.자세히 얘기하진 못하지만, 대략적으로 어떤 일이든 간에 의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내가 의도를 전달했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의도에 관한 피드백 또한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다. 이 대화를 나눈 뒤에 나는 촬영장에서 의도를 잘 전달한 감독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tempImageQe6XyD.heic 안성재 셰프가 말하는 의도의 중요성


보통 시나리오를 쓰면 기획의도를 쓴다. 기획의도란 어떤 기획을 하는 이유와 목적, 그리고 그 기획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가치나 방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단순히 '무엇을 만들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왜'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가치를 제공하고자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돌이켜보면 시나리오를 작성할 때부터 촬영이 끝날 때까지 모든 과정은 결국 나의 의도를 전달하는 과정이었다. 그만큼 연출자가 어떤 의도를 갖는가는 영화 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정말 솔직히 쓰자면, 이번 영화에서 나의 의도를 설득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그 점을 가장 크게 느꼈던 건 2회 차 막바지쯤이었다. 이때 촬영 했던 씬은 개인적으로 영화의 하이라이트 씬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기대와 걱정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촬영 시간 자체가 딜레이 되다 보니 원래 촬영하려던 컷 수에서 절반 가량 줄여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친 상태이다 보니 명료한 답을 내리기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컷수를 줄이고 촬영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컷의 그림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때, 촬영장에 있던 모든 스태프들이 나에게 도움을 주고자 피드백을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에 수많은 피드백을 듣다 보니 판단력이 흐려졌다. 내가 원래 이 씬에서 전달하고자 했던 의도는 주인공이 위기상황에서 재치 있게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빠져나오는 장면을 통해 주인공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의 연기 톤이 너무 심각해지거나 어두워지면 안 되는 게 포인트였다. 촬영 중간 나는 원래 썼던 의도를 간과하고 연기의 톤 앤 매너를 어두운 쪽으로 바꿔버리는 실수를 했다. 그래서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는 혼란스러워했고, 결국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쪽으로 연기 디렉팅을 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편집 과정에서 각 씬들을 모아 붙여보니 어두운 연기 톤이 튀었다. 다행히, 추가 촬영이 잡혀서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애초에 실수가 없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영화의 톤 앤 매너의 중요성을 체감 한 순간이었다. 톤 앤 매너는 다시 말하면 영화 감정의 온도인데, 이 온도가 매 순간 달라지면 관객은 감정의 맥을 잃게 된다. 더욱이, 영화는 하나의 약속된 세계인데 그 세계가 매 순간 달라지다 보면 관객은 이 영화의 세계를 어느 순간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톤 앤 매너는 영화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결국, 톤 앤 매너를 유지한다는 것은 감독, 촬영, 배우, 각 파트 별 스태프들 모두 전부가 하나의 언어를 쓰도록 만드는 일이다. 즉, 한 세계가 완고히 구축되기 위해서는 같은 걸 이야기하고 있어야 하는 거다. 우선, 내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느냐를 자각하고, 그다음은 이를 올바르게 전달하였는지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본질이 흐려지고, 자칫하면 내가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수 있는 거다. 그렇기에 영화 작업 내내 지치더라도 연출자는 스태프들 그리고 배우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작품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 같다.


추가 촬영이 1회 남은 이 시점에서 다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금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영상물들은 어떤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기반인 걸까? 아직은 흩뿌려져 있는 퍼즐 조각들 같지만, 지금 조금씩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남은 추가 촬영에서 잠시 잊었었던 본래의 의도를 되찾아 마지막 조각들을 잘 만들어보고자 한다. 사실, 정답이라는 게 없어서 지금 하는 고민도 불확실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도를 명확히 갖고 ‘무엇이 가장 정답에 가까운 그림들일까’를 고민하는 건 그만큼 나의 세계가 진실되어 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촬영이 잘 마무리될 수 있게 기도로 마무리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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