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었던 그때 그 폭력에 맞서서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광주에 대한 책을 쓴 후 자살을 결심하지만 모처럼 숨을 끊지 못하는 소설가 경하의 이야기이다. 에어컨이 고장난 서울의 한 아파트에 사는 그녀는 아무 일 없이 거실 바닥에 누워 더위를 견디는 일이 일상이다. 해가 넘어가 날씨가 조금 서늘해질 즈음 유서를 쓰려 시도하지만, 첫 문장조차 쓰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녀는 좀처럼 작별 인사를 쓸 수 없다.
이 책은 마치 한강 작가와 꼭 닮은 화자의 서울 집에서 시작한다. 화자는 지나간 비극적인 사건으로부터 고통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생을 포기하고 싶어하지만, 좀처럼 생과 작별할 수 없다. 그녀는 욕조에 몸을 뉘었다가도 이내 죽 한 그릇을 먹고 정신을 차린다. 에어컨이 고장나 견딜 수 없는 폭염이 찾아오면 가만히 바닥에 등을 대고 피한다. 여린 듯 하지만 강하게 삶을 버텨내는 그녀에게 어느 날 옛 친구 인선의 문자가 도착한다. 인선은 예전 경하가 제안한 프로젝트 - 통나무를 잘라 영상물로 담는 작업- 을 하느라 손을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다.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끝없이 바늘로 손가락을 찌르는 형벌을 감당하며, 그녀는 경하에게 제주로 가서 자신이 돌보던 앵무새가 죽지 않도록 돌봐달라 말한다.
경하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인선으로, 이후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정심의 어린 시절, "빨갱이들을 남김 없이 절멸하라"는 명 아래 제주의 사람들은 운동장에서, 바닷가에서, 자신의 집 앞에서 총살당한다. 그녀는 가족의 유해를 수습하려 신문 기사를 뒤지고 유족회 활동을 해나가지만, 군부의 통치로 인해 한계에 부딪힌다. 경하는 예전에 정심을 만난 적이 있다. "잘 놀다 가세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고운 목소리, 나이든 소녀 같았던 그녀의 진실은 깊고도 어두운 곳에 있었다.
많은 이들이 4.3 사건을 아주 어렴풋한 인상으로 기억한다. 많이들 "교과서 귀퉁이에 있었던 사건"으로 떠올릴 뿐이다. 그러나 4.3은 무려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에 달하는 3만명 가량의 사망자를 낸 중대한 사건이다. 1948년 "빨갱이를 몰아내라"라는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지침으로 인해 극우 단체와 군이 파견되었고, 제주도 해안가로부터 5km 떨어진 중산간 지역으로 통행할 경우 폭도로 간주한다는 소개령이 내려진다. 민간인을 사살하는 일이 용인되고 포상되었으며, 젊은 남자가 아닌 아이와 여자들까지도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법 절차 없이 처형되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희생자의 유해는 간 데 없이 흩어진다. 사건 이후에도 빨갱이라는 오명을 남길까 두려워 제주도 사람들은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 시기에 최초로 진상 조사가 시작되었고, 2002년 노무현 정부가 되어서야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4.3 사건의 유족에게 사과하였다. 내 가족이 왜 죽었는지, 어디에서 죽었는지 말하지 못하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눈물을 터뜨리며 사실은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우리가 이렇게 아팠노라고 고백하였다.
2024년 12월, 대통령이 40년만에 계엄령을 내린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날 독수리다방에서 친구들과 이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4.3 사건을 이제야 알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이토록 끔찍한 사건이 어떻게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는지를 계속해서 한탄하였다. 12.3 사태의 참고 문건 목록에 4.3 사건과 5.18 사건 당시의 계엄령 문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헌법을 준수하겠다던 대통령은 시체를 바다에 내몰고, 어디에 갔는지도 모르게 처리하고, 까닭 없이 빨갱이로 몰아 죽였던 그 역사를 반복하고 싶었던 것일까. 슬픈 사실은 아직도 이 땅에 사는 사람 중 20%는 "계엄령으로 빨갱이를 싹 쓸어버렸던" 그때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힘을 향한 숭배. 군인이 통치하던 시대에 대한 향수. 사람을 죽이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데에서 느끼는 권능감.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폭력적인가. 사람이 폭력적이고 악하다면 그들에게 밟힌 사람들은 왜 그렇게 선한 얼굴을 하고 있는가? 정심은 어떻게 일가족을 잃은 슬픔을 안고 눈 덮인 운동장에 놓인 시체들을 하나 하나 확인할 수 있었나? 피부 위로 떨어지는 얇은 눈송이가 녹지 않는 것을 두고 보면서, 생의 연약함을 어떻게 그렇게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나?
어떤 사람들은 아픔을 이야기하는 역사적 피해자 앞에서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호통친다. 세월호 유가족, 이태원 참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광주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 4.3 사건으로 평생을 고통받아 온 사람들에게 똑같은 호통이 반복된다. 다 지나간 일이지 않습니까? 그냥 묻어두고 나아가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냥 묻어뒀을 때,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지 않았을 때 이득을 보는 쪽은 누구인가? 지나간 세월의 트라우마를 납작하게, 자신의 일이 아닌 양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역사의 커다란 폭력 앞에 가족을 잃고 이웃을 잃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던 시민이, 그 이야기를 듣게 된 인간이,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정말로 우리는 '작별할 수' 있는가?
책에서 먼저 작별하지 않기를 택한 인물은 정심이다. 마냥 소녀 같았던 그녀는 사건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자신이 알게 된 진실을 딸 인선에게 전한다. 인선 역시 시대의 증언자가 되어 해외 다른 섬에서 발생한 학살에 대한 기록을 이어간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아마도 작가 자신을 투영한 인물일 경하는, 광주시에서의 사건을 폭로하는 소설을 쓴 이후 인선의 말을 전해 들으며 또 다른 증언자로 남는다. 삶을 포기하고 모든 기억과 트라우마를 뒤로 하려는 시도는 실패한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 속 피어나는 불꽃을 키워간다. 강인하고 밝은 하나의 빛으로, 차가움을 녹이는 따스함으로.
작별하지 않는 일은 고통스럽다. 정심은 죽음을 앞두고 어린아이가 되어 인선에게 자신을 구해달라 애원한다. 인선은 손가락을 잃고 죽을 것 같은 고통과 매일 싸운다. 경하는 눈보라를 뚫고 제주도로 날아가 얼어붙은 건천에 빠진다. 버스를 타지 말았어야 했는데. 경하는 읊조린다. 그 상처를 그냥 덮었어야 했는데. 고통을 외면하고 기억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살았어야 했는데. 안락한 곳에 머물렀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들은 그럴 수 없다. 제게 왜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 저를 괴롭게 합니까라며 울부짖던 광주의 한 교사처럼 그들은 고통을 감싸안는다. 아마도 그 가슴 속에 너무 큰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친구 중 한명이 이야기한다. "어쩌면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하고 아무 소리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소설 속 인물과 달리 상처를 잘 덮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패배자이고 싶지 않아서, 그냥 상처를 받지 않은 척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가해자에게 서사를 주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 순간 피해자를 조롱하고 모욕하려 하던 그들이 약간 가엾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이 어떻게든 약자가 되지 않을 거라 필사적으로 외면하는 모습. 힘을 쫓고 폭력을 추종하면 그 역사의 파도를 비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랑한 희망.
그런 희망에 비해 인선과 경하가 갖는 희망은 조금 더 따뜻하지 않은가?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로부터 삶을 부여받은 우리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그 시절부터 제주를 지켜온 나무와 혼들은 우리와 작별하지 않았다. 죽은 자는 산 자를 구하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독자는 아름다움으로 피어난다. 불꽃처럼, 한없이 가볍고 연약한 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