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일리 May 23. 2021

2. 공존

어차피 같이 살아야 할 거라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더이상 회생 가능성이 없는 쓸모없는 인간들을 쓰레기봉지에 넣어 재활용한다는 설정으로 전개되는 연극이다. 시민들은 가정에서 가장 쓸모 없는 사람을 쓰레기장으로 내놓고 재활용 신청을 할 수 있는 사회에 산다. 쓰레기로 분류된 인간들은 현생에서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헛수고일 뿐이다. 그들은 기억을 잃고는 다른 인간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미화원으로 다시 태어난다. 자기 앞에 며느리나 아들이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의 인생은 이미 재활용된 상태인 것이다. 


연극은 과격한 소재와 명확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소중하다는 식의 휴머니즘이 관객의 마음을 울리고, 관객은 세상을 한층 더 이해했다는 자부심으로 극장을 떠난다. 그러나 극장 한켠에는 작가의 휴머니즘에 공감하지 못하고 삐딱한 생각을 하는 관객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만난 수많은 '쓰레기 인간'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다. 혹시 이 세상에는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 있는 것은 아닐까? 평생 고기를 먹지 않고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것보다 결국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게 환경오염을 막는 길이라는 기사가 떠오른다. 만약 정말 인간을 재활용하는게 가능하다면, 재활용하지 않을 이유는 뭐란 말인가? 아니 굳이 재활용을 하지 않더라도 만약 쓰레기 같은 인간이 있다고 했을때, 그냥 그 사람이 죽어가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까 정말 극단적인 경우에.


학생 시절 모두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론을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진화론에게서 영감을 받은 이 이론은, 인간 사회에서도 더 우수한 종류의 DNA를 가진 인간만이 살아남게 된다고 주장한다. 자연이 인간 사회에서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라 지레 짐작한 이 오만한 이론은 2차 세계대전동안 수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으나,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졌다 비판받고는 한다. 우리는 이제 특정 인종/종교/경제적, 정치적 지위에 따라 인간의 목숨을 뺏어가서는 안된다는 대원칙으로 살아간다. 인종을 청소할 수 없는 시대, 모두가 최소한의 도덕률을 시키고 살아가는 시대. 이제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인간을 '쓰레기'인지 판단하고, 그리고 쓰레기와 비쓰레기 인간들이 어떻게 같이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즉 공존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존 共存   

1.    같이 존재(存在)함

2.    함께 도우며 살아나감.


1)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공존의 첫번째 원칙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인간은 더불어 살아갈 자격이 없다. 우리가 아동성폭력 전과가 있는 사람과 한동네에 살거나, 타인을 폭행하고 속이는 사람과 함께 동네 반상회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회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최소한의 도덕률을 어긴 자들을 일련의 사법 절차를 통해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다. 이 단계에는 공존 불가능한 사람의 인권이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타인의 감정과 인권을 해치는 사람에게 굳이 격리되어 기분이 어떻는지 물어보지 않는다. 1단계는 함께 살아갈 사람을 고르는 과정이 아닌, 함께 살아가지 않을 사람을 고른다는 점에서 수동적 공존 방식이라 할 수 있다. 


2)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라

공존의 두번째 원칙이다.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교환 가능한 재화가 필요하다. 단순히 먹고 마실 돈이 필요할 뿐 아니라 살아갈 집과 다른 사람 앞에서 '사회적으로 있어 보일' 만한 많은 장치들을 갖추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준법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 다만 사회인으로서 필요한 소비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은 단순히 법을 지키는 일보다 만만치 가 않다. 계속해서 바뀌는 환경 속 어제는 쓸모 있었던 일이 오늘은 쓸모 없어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원칙적으로 완전 고용 및 균등한 분배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와는 달리,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가치 있다 여겨지는 이들에게 더 많은 보수를 지급한다. 한 인간이 벌어들이는 임금의 높고 낮음은 어떻게 결정될까? 우리는 헤지펀드 매니저가 1년에 쉽게 1억 이상을 벌어들이고, 고등학교 교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성격의 일을 하는 고등학교 교사와 학원 강사의 임금은 아주 많은 차이가 난다. 어떤 나라에서는 최저시급이 2달러 밖에 되지 못하고, 한국에서는 최저시급이 8720원이다. 결국 임금의 분배는 시작부터 평등하다거나 공정하지 않다. 이는 결국 시장이 얼마나 그 사람의 노동력에 지불할 가치가 있느냐로 결정된다.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은 낮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에 따라 임금이 천차만별로 갈라질 수 있다. 우리는 노력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어린 시절 꿈을 놓지 못했으나, 사실 시장은 지독한 운과 알 수 없는 시장논리로 돌아갈 뿐이다. 시장에서 통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은 그리하여 점점 도태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재활용되기를 바라는 연극 속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마이클 센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이 불공정함이 일련의 극우운동(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브렉시트 찬성, 극우 범죄)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최근 시장에서의 가치인 보수(임금)을 마치 개인이 노력해서/선해서 얻는 결과인 것처럼 호도하여, 충분하지 못한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줬다는 주장이다.


(본문 발췌)도덕적으로 보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시장 중심 사회가 성공자에게 후하게 베풀기 마련인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은 '통제 불가능한 요인에 근거한 보상이나 박탈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정한 재능의 소유(또는 결여)를 순전히 각자의 몫으로 봐도 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노력했지만 시장이 반기는 재능은 없는 탓에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중략) ...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은 오만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이러한 도덕 감정은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반항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이민자들이나 아웃소싱에 대한 반항 차원을 넘어, 포퓰리즘의 불만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향한다. 그리고 그 불만은 정당화된다. 


새로운 세계와 시민들의 합창에서처럼 우리가 인간을 재활용 할 수 있었더라면, 우린 지금쯤 도태된 인간들을 격리시킨 인간들처럼 어떤 미지의 공간에서 재활용시켰을지 모른다.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 자들이 현생에서의 모멸감과 비인간적 처우를 다 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연극과 달리 도태된 인간을 그대로 사회 주변으로 치우기만 할 뿐 방치할 뿐이다. 모멸감은 쌓여가고, 사회 문제는 더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오른다. 이것은 공존이 아니라 병존이라 불러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지 않고 각자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갈 뿐이다. 갈등과 빈곤과 모멸감과 비인간적 노동을 발 아래 두고서.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가 계속해서 공존이 아닌 병존의 상태로 있을 경우, 도태된/혹은 도태될 사람들의 목소리와 감정은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냄새난다'고 손가락질했던 기생충의 아버지가 끝끝내 그의 상사를 칼로 찔렀듯 말이다.


기생충은 결국 '함께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그리고 있다

그러니 이 글은 공존에 대한 따뜻한 감상이나 휴머니즘적인 교훈을 역설하는 글이 아니다. 재활용이 불가능한 살과 피를 가진 사람들의 생존에 대한 실용적인 시각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린 결국 같이 살아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이다. 어차피 같이 살아야 할 수 밖에 없다면.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을 떠나고 싶은 날이 많아지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