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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Oct 24. 2021

어떤 달팽이의 삶

어느 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해 버렸다.

크리스마스에도 서점은 아름다운 커플들로 북적였다.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인파 속에서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인턴 자기소개서를 써 볼까. 정규직 보장이 안되더라도 혹시나 모든 기업에 다 떨어졌을 때를 대비해 '총알'을 만들어두는 게 중요했다. 취업 사이트를 기웃거리며 쓸 만한 인턴 공고를 물색했다. 매일 접속하다 보니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따로 입력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로그인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익숙한 진동소리가 들렸고, 마음이 조금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이 진동을 취업 준비 기간 동안 충분히 들었다. 어떤 것은 좋은 소식을, 그리고 대부분의 것은 좋지 않은 소식을 가져왔다. 심장이 빨리 뛰었지만 확인하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검지로 두들겼다.


축하합니다 귀하는..


아, 이건 합격이 틀림없었다.


시끄러웠던 크리스마스의 서점이 고요해지는 듯했다. 이메일을 읽고  읽어도 합격했다는 내용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인턴 자기소개서 페이지를 닫았다. , 이제  일할  있구나.    있구나. 왜인지 눈물이 조금 나는  같았다.


"엄마 나 xx기업 합격했어. 방금 이메일 확인했어. 나 이제 여기 안 살아도 돼. 이 기업에서 기숙사 준대."


당장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우선 밖으로 나갔다. 한겨울이었지만 전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시트콤의 주인공처럼 동네 사람들! 저 취업 성공했어요!라고 말하며 뛰어다니고 싶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도 기뻤지만, 무엇보다도 취업 준비를 한번 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쉐어하우스에서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기뻤다. 공동 화장실과 분리수거함이여, 밤늦게 들리는 수다여, 방 안에서 넷플릭스 볼륨을 쉽게 올리지 못하던 날이여 안녕. 난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아니 그 모든 굴레와 속박을 향해 떠날 것이다. 서울에 입성한 이래 가장 따뜻한 크리스마스였다.


나는 스물여섯의 겨울에 한 기업에 취직했다. 취업을 준비하며 살았던 곳은 학교 앞 쉐어하우스였다. 본가로 돌아가서 준비할 수도 있었지만 취업 박람회나 면접 스터디를 하려면 서울에 있어야 한다며 서울에 남아있기를 고집했다. 생활비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부모님은 6개월 간은 우선 서울에 살게 해 주겠다는 관용을 베푸셨다. 그때는 이 쉐어하우스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리고 이 기업에서 주는 기숙사에만 들어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알았다.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서 오피스텔 전세로 들어가야지. 내 집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내가 아는 부동산은 월세와 전세밖에 없었다. 어차피 서울 집은 비싸니까, 계속 전세로 살게 되지 않을까?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살아가던 2019년이었다.


2020년 입사 후 회사 기숙사에 살면서부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 연봉의 여섯 배를 줘야 겨우 방 한 칸 전세를 구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부터 안일한 생각에 금이 갔다. 기숙사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끝나면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다시 취업 준비를 할 때 살았던 쉐어하우스 정도였다. 이미 회사에서 과장, 차장 직급을 단 상사들은 자기네들 집값이 두배 뛰었다며 기뻐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거지? 순간 내가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살아왔던 수많은 방들이 생각났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기업에 취직을 하면 사람다운 집에 살 수 있는 거 아니었나. 혼란은 깊어졌고, 신입사원의 근로 의욕은 떨어졌다.


이 글은 취업하면서 부동산 폭등을 경험한 어느 사회초년생의 회고록이다. 스물여덟, 올라가는 자산 가격의 그래프 앞에서 글을 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돌이켜보니 나와 아버지는 일자리와 학업에 치여 지금까지 주거지를 택하기보다는 쫓아 살아오고 있었다. 나와 내 가족을 비롯한 많은 지방 사람들은 마치 등 뒤에 집을 이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전국을 이동했다.


이 책을 통해 나와 비슷한 많은 달팽이들에게는 공감을, 그리고 부동산을 투자 자산으로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약간 비뚤어진 생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내 삶은 공짜이니, 씹고 뜯고 맛보고 (가능하다면) 즐겨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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