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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ley Sep 01. 2024

왜 모든 엔딩은 사랑이여야 하나요?

The most Cristina-y Ending

요즘 나의 취미는 <그레이 아나토미> 정주행이다. 생각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기대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밤을 새우도록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10년 넘게 현재도 진행되고 있을 정도로 시즌이 정말 많고, 사람들이 모두 말하는 가장 재밌었던 시즌 1,2,3을 지나 현재는 시즌 8을 보고 있다. 그동안 어떤 출연자들은 극 속에서 죽고, 어떤 출연자들은 이혼하고, 결혼하며 극은 진행되고 있다. 확실히 시즌 4부터 등장인물들 간의 재미는 좀 떨어졌지만, 그래도 시즌 마지막화에 나오는 극적인 전개가 아무리 졸려도 드라마를 끄고 잠들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애증'의 그레이 아나토미라고 부른다. 전개가 완벽하지도 않고, 재미도 좀 줄었고, 때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이해 안가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있지만, 그래도 이 드라마를 놓지 못하고 계속해서 보게 만드는 무언가가 사람들 각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는 아마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주인공 커플일 수도 있고, 어떤 캐릭터 일수도 있으며, 혹은 병원 안에서 나오는 많은 환자들의 에피소드나 수술 장면이거나, 등장인물들의 성장 스토리, 혹은 그저 드라마와의 의리나 정일 수도 있다.


그런 이 드라마는 내게는 '결국 크리스티나는 행복해지는가?'였다. 내게 시즌 1-3은 에피소드 한편마다 마지막에 30초씩 주어지는 크리스티나-버크 커플의 연애를 보기 위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주인공 커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데릭은 사실은 외도였음에도 자신의 사랑이 천년의 사랑인 양 구는 전형적인 내로남불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의 상대역이자 극의 주인공인 메러디스에게는 애정이 있고, 이해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런 그녀가 데릭에게는 아까웠기 때문에 주인공 커플을 응원한 적은 없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티나-버크 커플이 동거 문제, 버크의 수전증 문제 등으로 다툴 때마다 이들이 결국은 헤어질 것인지, 혹은 잘 헤쳐나가 다시 행복해질 것인지가 궁금했고, 그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음화를 끌 수 없었다. 드라마 전개 내내 이 커플은 항상 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았으므로 내가 흐뭇하게 이 커플의 행복을 볼 시간은 별로 없었다. 배우의 하차 때문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 커플은 결혼식 장에서 파혼을 선언하고 끝난다.


이 후 크리스티나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한다. 나는 그때 버크에게 한창 빠져있었기 때문에 사실 오웬 헌트의 출연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두 사람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크리스티나-오웬 커플을 보고 있다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내가 크리스티나-버크의 이야기를 볼 때처럼 전전긍긍해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오웬은 버크보다 크리스티나에게 불도저처럼 뭔가를 압박하지 않았으며, 외려 크리스티나가 오웬에게 먼저 다가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별로 원하지 않지만 버크를 사랑했기에 그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되고, 결혼을 진행했던 크리스티나의 체념과 복잡함의 표정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어 마음이 편했고, 그렇게 이 커플이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이루기를 원하며 여전히 극 마지막에 30초씩만 나오는 이 커플의 연애를 위해 드라마를 보았다. 크리스티나가 아이를 갖고, 낙태를 하기 전까지는.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그 표정을 봐야 했다. 나는 원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에 대하여 나 자신을 이해받고 싶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싶은 복잡한 그 표정. 나는 그녀의 그 표정이 참 싫다. 그 표정이 너무 나 같아서. 내가 그녀처럼 승부욕이 강하고, 청소를 싫어하고, 일할 때 감정을 모두 배제하진 않으나, 그래도 그녀가 가진 몇 가지 모습이 나와 겹쳐 보였고, 그녀가 타협하는 모습 또한, 나와 겹쳐 보였다. 그 타협의 순간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든 것인지 나는 알기에, 제발 그녀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그렇게 힘든 타협을 할바에야 버크든 오웬이든 다 집어치우고 혼자 멋있게 당당하게 살라고 하고 싶기도 하였으나 그렇게 말하기에는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사랑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사랑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 사랑은 남들과 조금 다른, 보편적이지 않은 생각을 가진 나를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힘들 때 힘이 되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나를 책임져주지 않아도 괜찮다. 내게 거대한 것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나를 스스로 책임질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나도 사람이기에, 흔들리거나 외로운 순간이 있다. 그럴 때 나타나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에게 공감해주고, 나를 이해해줄 사람. 그저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해 줄 사람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내 가치관을 잘 알고 있어서 온 마음으로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 그런 사람이 평생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나는 깨달았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을 그만두었으나 극 속의 그녀라도 그런 사람을 찾아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만을 가지고 드라마를 여기까지 시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한다. 그녀는 결국 오웬하고도 헤어진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장면이 무엇인지 아는가? 엄청난 지원을 받으며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꿈을 끝도 없이 펼칠 수 있는 연구소장이 된다. 그녀의 마지막 장면은 그 사무실의 Dr.Cristina Yang 이란 이름이 새겨진 문을 보여주며 끝난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에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나 대신 다른 방식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녀가 결국은 그 방향으로는 행복해지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 장면이 되살아 날 때마다 그 장면이 너무나 크리스티나다운 결말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모든 결말은 사랑이어야 하는가? 연구소장이 되어 자신의 소원대로 매일 심장을 쥐고 펼 수 있는 그녀의 삶에 더 이상 사랑이 없을까? 아니, 그녀는 앞으로도 열정적으로 사랑을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그녀의 마지막을 보여준다면, 내가 생각해도 한 남자와 행복하게 알콩달콩하는 모습이 아니라 이런 모습이 더 그녀답다는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녀를 나보다 더 완벽하게 그녀답게 해석해 준 작가와 감독들에 오히려 감동받았다.


그래서 그레이 아나토미가 애증의 드라마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시즌 10이 될 때까지 크리스티나를 행복하게 해 줄 남자를 그려주지 않은 작가에게 원망의 마음이 들면서도, 이렇게 그녀를 완벽하게 그리고 끝 마쳐준 데에는 고마움을 느낀다. 내게 이 이제 드라마는 시즌 10으로 종영되었다. 여러모로 힘든 일들이 겹쳐 고통 받던 나에게 그래도 돌파구가 되어준 고마운 드라마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일이든, 자기 자신이든, 크리스티나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 후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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