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가 인생영화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오랫동안 서로 마음은 품고 있었으나 친구로 지내온 한 남녀의 이야기라는 게시물을 하나 보고 흥미를 이끌었던 영화 '러브, 로지'. 짧게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주인공 남녀는 유치원 혹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오랜 세월 친구였으며, 누구보다 친한 사이였다. 고등학교 졸업 무도회에 원래 파트너로 함께 가려했던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을 숨기고 각각 그 시절 본인들에게 관심을 보이던 다른 인물과 파트너가 되어 졸업식을 가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한 사람은 영국에, 한 사람은 미국에 살게 되며 각자 서로에게 마음은 있으나 계속해서 마음을 전할 타이밍이 어긋나게 되는 아주 지지부진한 이야기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궁금해져 영화를 보셨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이런 마음이 들 정도로 나는 이 영화가 꽤 마음에 들었나보다. 생각없이 틀어놨는데 어느 순간부터 감정이입해서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인생영화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잘 만들어진, 꽤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근데 이 영화를 보며 계속해서 다른 영화인 '라라랜드'가 겹쳐졌다. 라라랜드가 한참 상영하던 시절은 내가 LA에 살기 전이었으므로 나는 LA란 도시에 대한 큰 환상이 없었고, 웬만해선 영화관에서 중도에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내가 처음으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영화관에서 너무 힘들어했던 기억이 선명했으므로 사람들이 아무리 이 영화에 감명 받았대도 영화관에서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이렇게 다들 영화를 찬양하는가 싶어서 나중에 OTT 서비스에 올라오면 그 때 한번쯤 봐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후 나는 라라랜드를 총 세번의 시도 끝에 겨우 다 볼 수 있게된다. 두 번이나 지루해서 중도 하차를 했다가 또 사람들의 찬양을 듣고 궁금해서 다시 시도해보는 그런 모습이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영화를 끝까지 참고 봤으나 여전히 어떤 포인트에서 사람들이 이 영화를 이토록 좋아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또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부분이 있다 싶으면 왜 그런가를 열심히 탐구하는 사람이므로 온갖 라라랜드에 대한 후기와 해설을 보면서 도대체 내가 받지 못한 감동의 포인트가 어디인지 열심히 탐구했다.
많은 사람들이 라라랜드의 작품성은 결말에서 나온다고 한다. 주인공 커플이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식의 결말이 이미 통용된 한국 사회에서 주인공 커플이 결국 헤어지는 결말이라니. 이는 어벤져스-인피니티워의 결말이 "어벤져들 (거의) 다 죽어"였던 것과 같은 센세이션한 결말이 아닌가. 그리고 그 커플의 '만약 우리가 그 때 헤어지지 않았더라면?'의 상상의 영상이 흘러나오며 사람들의 슬픔을 더 자극한다. 그 '만약'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작품성이라는 해설을 가장 많이 본 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결국 커플이 헤어지고 여자는 그냥도 아니고 아주 잘 나가는 배우가 되고, 그 두 사람이 우연히 바에서 만나게 된다는 결말이 가장 클리쉐 같이 느껴졌다면 내가 이 영화를 오독한 것일까? 내가 이 영화에서 감흥을 얻지 못했던 이유는 내겐 이 스토리가 전혀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결국 라라랜드가 많은 사람들의 인생영화인 이유를 머리로는 알겠지만, 마음으로는 모르겠는 그런 어정쩡한 상태에서 탐구를 멈추었다.
그러나 '러브, 로지'를 보면서 왜 사람들이 라라랜드의 '만약'에 그토록 감명 받았는지 마음으로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러브, 로지'는 나의 '라라랜드'였던 것이다. 영화를 보며 계속해서 마음 속으로 외쳤다. '만약 그 때 그들이 다른 파트너가 아니라 함께 무도회를 갔다면?', '만약 그 때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만약 그 때 그가 싱글이었다면?', '만약 그 때 편지를 남편이 가로채지 않았다면?' 서로에게 갈 수 있는 수 많은 과정마다 또 다른 발목이 두 주인공을 끌어내리는 순간들을 보며 계속해서 나는 그 두 사람의 18살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차피 서로 같이 가고 싶었던 거, 아닌 체 하지말고 좀 같이 가지! (그랬다면 이 영화는 없었을테지만) 그렇게 수많은 만약에, 만약에를 외치다보니 어느새 영화가 끝나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나는 궁금했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정말 라라랜드와 비슷한데 나는 왜 라라랜드에서 느꼈던 클리셰를 이 영화에서는 느끼지 못했을까? 이 영화야 말로 생각해보면 정말 클리셰 덩어리인데 말이다.
나는 그 차이가 주인공들이 서로 알고 지낸 시간에 있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오랜 시간 많은 이야기와 시간을 나눴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가치관이 비슷하고 점점 더 서로와 비슷해져 가는 러브, 로지의 주인공과 달리 서로에게 으르렁거리다가 갑자기 지는 해를 보며 탭댄스를 추고, 알고보니 남자 주인공의 차는 파티장에서 가까운 곳에 주차되어 있었는데 여자 주인공 때문에 멀리까지 같이 가서 탭댄스를 췄다는 전개를 보여주는 라라랜드는 내게 너무 개연성이 없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건 아마 내가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시간이 아주아주 오래 걸리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보통 어떤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의 길이에 비례해서 그 사람의 중요도가 달라지는 편이라 이제 사귄지 1년 된 연인보다 10년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편하고 즐겁게 느끼는 편이었고, 과거 내 연인들은 이를 꽤나 서운해했고, 나는 그런 그들을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고 마음의 강도에 따라 인간 관계에 중요도가 바뀌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어느정도는 이해한다. 그리고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인다.
그래서 내게는 라라랜드 주인공들의 사랑이 그토록 중요하고 애절한 사랑으로 와닿지가 않았다. 물론 이 세상에 중요하지 않고, 애절하지 않은 사랑은 없겠지만, 내게는 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시간도 사랑을 지속한 시간도 너무나도 짧았으므로 내 평생에 잊지 못할, '만약에'라는 말을 붙여 계속해서 되뇌어봐야 할 정도로 깊은 사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러브, 로지의 주인공들은 거의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서로에게 가족같은, 혹은 가족보다 더 깊은 사이를 유지해왔으므로 저 두 사람은 정말 서로를 위해 태어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와닿았던 것이다. 그동안 계속해서 '왜 라라랜드는 내 인생영화가 될 수 없을까?'하고 궁금해했는데, 어느 목요일 밤 우연찮게 본 영화를 통해 이렇게 또 나를 한번 더 알아간다. 누군가에게는 또 이 영화가 진부한 클리셰 덩어리로 느껴질 수 있겠지? 또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진다. 보람찬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