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도피, 그리고 -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매캐한 공기로 가득한 세상에서 내 작은 마음은 불안과 슬픔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머물던 곳은 비가 쉬지 않고 내렸고 눈물과 비가 뒤섞여 흐르는 날들이었다. 끝없는 비 속에서 눈물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았다.
“난 한 달 내내 집 밖을 나가지 않았어.”
그렇게 길을 잃고 도망치듯 떠나온 곳에서, 너와 처음으로 마주했다.
“나도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던 적 있었어. 머리카락마저 빠지더라.”
너의 말에 너도 나와 다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매일 눈물 속에서 살아왔다는 너의 고백은 우리가 서로의 슬픔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로의 망가진 마음을 조심스레 꺼내 보여주었다. 내 마음은 이리저리 나누어주고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해 한없이 작아져 있었고, 너의 마음은 상처로 온통 멍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상처를 서로에게 내밀며 보듬어주기로 했다.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이어 붙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불렀다. 내 작아진 마음은 너를 어루만지며 자라났고, 너의 멍든 마음은 나를 통해 서서히 붉은 기운을 되찾아갔다.
그 사랑은 마치 불꽃처럼 타올랐고, 그곳에서 더 이상의 비는 내리지 않았다. 하늘은 언제나 맑았고, 햇살은 우리를 감싸 안으며 미소를 머금게 했다. 우리는 더 이상 슬픔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속에서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어느 날, 사랑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은 마치 당장 꺼져버릴 듯한 희미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사랑의 팔딱거림은 죽음의 전조인지, 아니면 마지막으로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사랑이 다시 불타오르기를 바랐지만, 사랑은 여전히 희미한 숨을 내쉬는 데 그쳤다.
그때서야 우리가 서서히 야위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와 눈물의 세계에서 도망쳐 나온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메마르게 하는 태양빛이었다. 그저 사랑에 눈이 멀어 그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지렁이였던 걸까? 지렁이는 비에 젖은 땅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기어 나온다. 우리도 슬픔이 넘쳐흐르는 세계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나와 이 맑은 곳에서 서로를 만났다. 어쩌면 우리가 지렁이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처음엔 따뜻한 햇살이 마치 구원처럼 느껴졌지만, 그 빛이 점점 더 강하게 내리쬐며 우리의 피부를 조여왔다. 서로에게서 위안을 찾으려 했지만, 이미 몸은 갈라지고 있었고, 마음은 그 틈새로 스며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어갔다. 살을 파고드는 것은 더 이상 태양의 따스함이 아니라, 그것이 남긴 날카로운 상처들이었다. 행복했던 찰나의 순간들은 점점 사라져 가고, 그 속에 숨겨져 있던 고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지렁이는 땅을 파고들며 살아간다. 우리는 지렁이였지만, 사랑이란 이름으로 지상에 남아버린 순간부터 흙 속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렸다. 햇살 아래에서 서서히 시들어가는 우리를 보며 다시 흙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내려야만 우리는 다시 그 안으로 기어들어갈 수 있을 텐데, 이곳에는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는다.
아, 우리는 지렁이였다.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우리는 찰나의 따스함에 몸을 맡기고, 결국 그 빛에 서서히 우리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지렁이였음을, 그리고 그 사실을 잊지 말았어야 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 우리는 지렁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