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 4장 > 자기 연민은 이제 그만

by 이유진

“너무 너 잘났다고 구는 거 아니냐?”

“아이고, 참. 뭐 시집 못 가서 큰일이라도 날 것 같수? 늦게 간다고 뭐 큰일 나나?”

“여자가 좀 고분고분하게 할 줄 도 알아야 돼. 너무 땍땍 거리면 안 된다고.”


직장도 얻었고 서울 살이도 슬슬 적응해 가고 있던 찰나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그렇듯이 우리 아빠 역시 다음 단계를 기대하기 시작하셨다. 나이는 들어가는데 만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 보다 못한 아빠가 결국 한 마디 하신 것이다. 그런 아빠에게 엄마는 한 소리 하셨지만 뼛속까지 경상도 사람인 아빠의 눈에는 이미 과년한 딸이었다. 동창 혹은 친구분들의 자녀 결혼 소식에 마음이 급해지신 듯싶었다. 게다가 동생이 결혼을 하려고 여자 친구를 한 번 데리고 온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나이가 서른이 되도록 남자 친구 한 번 소개해 준 적이 없으니 그러실 만도 했다. 엄마가 한창 이리저리 주변에 내 이야기를 해 둔 상태라 몇 번 소개팅을 한 적이 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아빠는 내가 다 퇴짜 맞은 거라고 생각하셨던 게 틀림없다. 물론 내가 퇴짜 맞은 것도 있고 퇴짜 놓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아빠 눈에 나는 무뚝뚝하고 애교 없는 딸내미였으니 당신에게는 그것이 큰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여태 속 한 번 썩인 적 없는 딸이었는데, 결혼 문제로 걱정을 끼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셨던 것 같다. 거기다 ‘딸내미가 선생이라 들었는데 왜 시집 안 가고 있냐’고 옆에서 한 마디씩 하신 분들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 그리 시집 잘 간다고 하는 선생님인데, 말은 못 하고 오죽 답답하셨을까. 그런데 나도 아빠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안정된 직장도 구했으니 이제 빨리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에 괜스레 조바심을 느끼곤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지만 나는 당시 나름의 방황 속에서 남들처럼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남들 가는 대학 쉽게 가지 못하고 재수를 했던 것, 그리고 대학 졸업 후 동기들 대부분이 쉽게 시험에 통과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늘 그들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한창 예쁘게 꾸미고 연애하고 놀러 다닐 때, 나 혼자 그런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슬펐다. 그래서 남들 하는 대로 따라서 사는 게 막연한 목표였던 것 같다. 남들 하는 대로 대학에 가고, 직업을 갖고, 때가 됐으니 결혼을 하고, 또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고, 그런 수순을 밟으며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고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이 살았다. 그래서 친구들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고민을 나누었고, 비슷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과 유대감을 쌓으며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며 하소연을 하곤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은 일생을 바칠만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드림 리스트> 표지에 적혀있는 말이다. 예전에 이 책을 보았다면 ‘일생을 바칠만한 계획이라니! 그런 건 삼성 회장이나 가질 수 있는 거야.’라고 치부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일생의 계획이란 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류의 이야기였다. 나는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늘 그냥 상황이 닥치는 대로 살아왔다. 학창 시절, 시험을 준비하면서 몇 점을 받아야겠다 혹은 몇 등이 하고 싶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놓고 공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편에 속했지만 목적의식이 없는 공부를 했다. 단지 지기 싫었을 뿐이고, 내가 못한 다는 그룹에 속한다는 것은 싫었기 때문에 공부를 했다. 그야말로 그냥 자존심의 문제였다. 공부를 잘해서 어떤 대학에 가겠다거나,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그런 인생의 계획에 대해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늘 벼락치기였고, 생각해 보면 매사에 모든 일이 그랬다. 그냥 당장 눈앞에 주어진 것들만 해쳐나가는 식이었다.


그저 남들 하는 대로 살아온 것 같다. 여행을 하는 것도 대학 가서 친구들이 여행을 다니는 것을 보니 가고 싶었고, 또 함께 가자고 하니 그렇게 하게 됐다. 직접 다녀보니 좋은 것을 알게 됐고, 그래서 이곳저곳을 다녔다. 영어 공부를 하는 것도 바이올린을 배우는 것도 그저 잘하고 싶다는 마음과 친구들에게 지기 싫다는 마음이 컸다.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찾지 못하고 그저 하는 것에 의의가 있었기에 어떤 구체적인 목표 없이 하면 하고, 말면 말고 그렇게 했다. 뭐든 어느 정도는 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 이상이 되기는 또 어려웠다.


대학 4년 동안 공부든 과제든 죽어라 열심히 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나 몰라라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성적은 중간 언저리에서 맴돌았는데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커리큘럼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교사로서의 소명은 생겨났다. 특히 실습을 하면서 그런 마음은 더 커졌다. 다행히 내 적성에 맞았던 것인지 현장에 나와서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교사로서 종종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믿음이 있었고, 그들에게 진심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대단한 소명의식을 가진 교사는 아니었지만 단순히 월급 받기 위해 학교를 오고 가는 직장인은 아니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딱 그만큼만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들이 나로 인해서 대단히 영향을 받는 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동시에 큰 상처를 받는 것도 싫다고 여겼다. 아이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고, 스스로를 그저 그들이 만나는 수많은 선생님 중의 한 명 일 뿐이라고 되내었다. 나도 아이들로 인해 상처 받는 것이 싫어서 한 걸음 물러서 있는 게 쿨하다고 생각했다. 단지 주어진 순간만 열심히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창 기간제 교사로 다닐 적에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 스승의 날 아이들이 갖다 준 수많은 편지들을 쓰레기통에 넣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일을 처음 보았을 때는 선생님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라며 속으로 그분을 비난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나도 모르게 그 사건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분 역시 처음부터 그러시진 않았을 것이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반복된 행위에 자기만의 대응책을 마련한 것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 일도 열심히 하시던 분이셨고, 담임 선생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이들이 편지를 들고 찾아올 만큼 아이들과의 상호작용도 원만한 분이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으로서 교장이 되어야겠다, 승진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막연히 동화책을 쓰고 싶다거나 내가 잘하는 분야 하나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뭘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학교에 있을 때면 고민을 했지만 퇴근하면 잊어버렸다. 그런 나에게 혼란의 시기가 찾아왔고 좋은 기회를 만나서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나는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엄마로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남들과 비슷하게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남들처럼 살기를 바랐다. 그런 나의 삶이 틀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내 삶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구체적인 목표'라는 것이 생긴 것이다. 여태 고민했던 것과는 좀 달랐다. '내 인생은 무엇인가'하고 막연히 고민하던 때와는 달랐다. 지난 시간 방황의 날들이 이제야 효력을 발휘한 것인지 나에 대해 그리고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과연 나의 사명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마침 내가 처한 시기와 생각들이 그런 고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해 주었다. 왜냐하면 아이를 낳으면서 훌륭한 부모가 되고 싶었고 아이들이 나를 생각하면 자랑스럽다 여길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보았던 안타까운 아이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딱히 어떤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저 하라고 하니까 시키는 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생님, 1년 담임하고 그 반에서 단 한 명이라도 선생님으로 인해 영향을 받은 아이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예요.”


처음 담임을 하고 아이들과 헤어진 후, 당장이라도 선생님하고 찾아올 것 만 같던 아이들이 그러지 않는 것에 섭섭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경력 10년 정도 되신 선배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말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만만했던 멋모르는 새내기 선생님에게 그런 말은 사실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고 경력이 쌓이면서 아이들을 받아들이고 떠나보내는 몇 번의 경험을 하다 보니 선생님이 그때 해주셨던 말씀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다. 당시에는 그 한 명이 너무 적다 생각되었는데, 그 한 명은 절대 적은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이제 '최고의 선생님이 되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그리고 늘 꿈꾸어 왔던 '작가'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쩌면 작가라는 것은 최고의 선생님이 되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나는 지금껏 늘 마음속 한편에 자리하고만 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늘 어떻게 하는 건지 헤매기만 했는데, 그 방법을 알게 되었고, 지금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나로 인해 누군가가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기를 꿈꾸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 아이들이 되기를 바란다. 일생을 바칠만한 계획이 내게도 생겼다.




*표지 사진 : Photo by Aline de Nadai on Unsplash


<이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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