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혹시 마라톤 해요?"(아가씨라니!!)
"아, 네."
"어쩐지... 잘 달리더라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달리는 중이었다. 작은 공원이다 보니 아무래도 걸어가는 사람들을 피해 혹은 그 사이로 지나가야 할 때가 있는데, 마침 한창 수다를 하시며 걸어가는 아주머니들 사이를 지나치게 됐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내 뒤통수로 마라톤 하느냐는 질문이 날아왔다. 아직 마라톤 대회를 나가본 적은 없는 마라톤 준비생이었지만 얼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간 달리기 하면서 수차례 마주친 적 있던 분이었는데, 아마 새벽에 나와서 뱅글뱅글 달리기를 하는 내가 궁금하셨나보다 싶었다. (초고를 쓸 때만 해도 마라톤 출전 전이었는데 현재는 10km 완주 경력 있는 마라토너가 됐다!)
나는 일주일에 3번 정도 달리기를 한다. 즉 이틀에 한 번꼴로 새벽에 나가서 집 근처의 공원을 뱅글뱅글 달리는데 보통 5km 정도를 뛰고 있다. 한 여름에는 새벽 5시경에도 해가 곧 떠오르기 직전이라 무섭지 았았는데 이제는 그 시간이면 밤인지 새벽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깜깜해진 늦가을이 되었다. 게다가 조금만 뛰어도 땀이 삐질 삐질 나던 것이 이제는 3킬로를 뛰면 겨우 땀이 조금 흐를 정도로 날씨도 쌀쌀해지고, 이래 저래 운동하기가 힘들어지는 계절이 찾아왔다.
지난 4월부터 시작한 달리기는 7개월에 접어들었다. 달리기 덕분에 근래에 꾸준한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운동의 중요성은 말해 입이 아플진대,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면서부터는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진 것이 사실이다. 운동을 좋아하고 그것과 가까이하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육아를 하면서 운동을 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체력 때문에 힘들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힘들지만 맛있는 걸 먹거나 자고 나면 금방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그간 운동으로 다져온 체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기본 체력이 있었다 할지라도 둘째를 임신하고 두 아이를 키워내는 과정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기본 체력으로 버티던 것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육체적 체력 못지않게 정신적 체력이 필요한 육아 전쟁에서 결국 나는 항복해 버렸다. 육아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육아 전쟁을 치르면서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내가 봐도 눈에 보였다.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체형이 바뀌어서 인지 살이 좀 빠졌음에도 결혼 전 입었던 옷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뭘 입어도 옷 테가 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원래도 꾸미는 것에 크게 관심 없었던 나는 점점 더 나를 가꾸는 데에 소홀해졌고, 배와 엉덩이를 가리기 위한 긴 티셔츠가 유일한 쇼핑 목록이 되었다. 거울 속엔 흐트러진 머리와 푸석푸석한 얼굴을 한 웬 아주머니 한 명이 서 있었고, 그런 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 점점 더 싫어지기 시작했다. 때때로 찾아오는 우울감은 육체적 피로에 정신적 피로를 안겨다 주었고, 그로 인한 짜증은 나의 아이들과 남편에게로 번져갔다.
운동을 좋아하지만 운동회 말고는 달리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올림픽 말고는 마라톤 대회에 대해 관심 가진 적이 없었던 내가 우연찮게 달리기를 시작하게 됐고, 하프 마라톤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혹여나 종아리가 굵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아닌 걱정 때문에 헬스장에서도 러닝 머신은 애써 피해왔는데 이렇게 달리게 될 줄이야.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더니 정말 신기하다 여겨진다.
그런데 매일도 아닌 단 이틀에 한 번 30분 달리기가 가져다준 변화는 실로 놀랍다. 일단 새벽에 공복인 상태로 뛰다 보니 살이 절로 빠졌다. 두 번의 임신과 출산을 거치며 다시는 아가씨 때의 몸매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우울했던 것이 웬말이냐는 듯 살이 쏙 빠졌다. 식욕이 줄어든 탓도 있겠지만 달리기로 인한 유산소 운동이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뛰는 동안만큼은 쓸데없는 생각들을 털어버리게 됐다는 점이 내게는 큰 전환이 됐다. 늘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나이지만 달리면서 나도 모르게 부정적 생각들을 날려버리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하게 되는 것이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다 뛰고 나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개운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작 뛰면서는 '왜 뛸까' 혹은 '힘들다'는 생각이 매번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땀이 쏙 날만큼 뛰고 난 후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 좋은 가벼움이 나를 업 상태로 만들어준다. 마무리 스트레칭으로 뭉친 근육들을 풀어주며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실 때의 그 느낌은 실로 마약처럼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만든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운동을 한다고 말하기에 부끄럽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이틀에 한 번 고작 3-40분 정도만을 달리는 것이 뭐 대단히 운동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달리지 않는 날에는 요가로 몸을 풀어주고자 하지만 30분을 채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에 새삼 꾸준한 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닫는다. 누군가는 나에게 어떻게 그리 열심히 뛰냐고 하지만 매일 1-2시간 씩 운동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운동은 그 축에도 못 끼는 것이니 그저 부끄럽다. 하지만 달리기를 통해 운동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내가 다시 운동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하다. 나는 운동을 통해 몸의 건강뿐 아니라 마음의 건강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몸에서 깃든다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마녀 체력>의 이영미 작가는 남편과 싸우면 사이클을 타고, <걷는 사람, 하정우>는 무언가 고민이 있으면 그저 쉼 없이 걷는다고 한다. <보통의 존재>에서 이석원 작가는 힘들고 지쳤을 때 '석원아, 책 읽고 운동해.'라는 지인의 충고를 들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작가의 말이 진심으로 나에게 와 닿기 위해서는 내가 그와 같은 경험을 해 봐야 한다. 나는 달리기를 하면서 그들의 말을 백 번 공감하게 됐고, 나의 마음 처방전에 필요한 명약은 바로 운동이었음을 확신한다. 삶이 우울해질 때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멍 때리기 대회가 있는 것처럼 잠시나마 머릿속을 비우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필요했다.
이제 해가 늦게 뜨면서 날도 어둡고 추워져 아침에 달리기 하러 나가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거짓말하지 않고 매번 나갈 때마다 수백 번 고민을 한다. '오늘은 그냥 쉴까?' 하지만 일단 나가고 보자는 생각으로 주섬 주섬 옷을 집어 든다. 달린다는 생각은 주저하게 만들지만 새벽 공기를 마시며 산책 혹은 스트레칭하는 것은 좋다고 느끼기에 그것만 생각하며 밖으로 나간다. 나가면 결국 뛰게 되니깐 말이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마라톤 대회를 나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톡방에서 마라톤을 나가시는 분들을 보면서 그저 다른 사람 이야기라 생각했고, 굳이 마라톤을 나가지 않아도 운동을 하는 것에 만족했다. 근데 또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레 대회를 자처하게 되는 내가 있다. 게다가 무려 하프 코스에 도전했다. 이러다가 언젠가 풀코스를 뛰고 있는 건 아닐까 싶지만 제발 그럴 날은 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꾸준히 뛴다는 것에 만족하고 싶다. 그래서 이번 춘천 마라톤 대회를 치르고 나면 당분간은 그저 이틀에 한 번 30분 달리기에 힘쓸 것이다. 앞으로 다가 올 겨울의 게으름에 지지 않고 달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표지 사진 : Photo by Morgan Sarkissia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