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독후감
트레바리 '이참에 읽자' 북클럽,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
[개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작가 레마르크의 자전적 소설이다. 고향에 살던 10대 후반의 파울은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며 학교 친구들과 함께 징집된다. 전쟁의 현실을 모른 채 무작정 입대한 파울은 정신을 개조하는 신병 교육을 버텨내고 프랑스와 맞닿은 서부 전선에 배치된다. 파울은 이후 몇차례의 싸움을 거치며 전우들을 하나둘 잃어가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외면하는 자기 자신을 보며 전쟁 이후의 삶의 목적, 그리고 가정에 뿌리내리지도 어리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대의 자신이 속한 세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간다. 전우들을 모두 잃고 외로움에 사무치던 어느 날, 파울은 전사하고 그날 상부에는 '서부 전선 이상 없음'으로 보고된다. 거시적으로 전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전쟁에 참여한 한 개인에 관해 미시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소설이다.
1. 생각과 본능의 관계
전쟁터는 생각과 본능이 필요에 따라 사람을 움켜잡고 목숨을 지키려 발버둥 치는 곳이다. 파울은 생각이나 본능이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순간들을 경계하며 자신의 본모습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생각과 본능은 어떤 것이 우위에 있다기보다는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이지만, 우리는 대체로 생각이 본능을 제어하는 삶을 추구한다. 다만 이는 생존이 보장된 경우의 이야기다.
국가의 보호 아래 안전한 생활을 영위하는 민간인들은 감정을 느끼고 자기 생각을 가지는 것을 살아있는 것이라 여긴다. 감정도 생각도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존재하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군인은 그 반대다. 이들에게 살아있는 사람이란 감정보다는 합리성을, 생각보다는 그 이전의 본능을 따르는 사람이다. 이렇듯 민간인과 군인은 생각과 본능의 우위가 뒤바뀌어 있다. 민간인에게 삶은 군인에게 죽음이고, 군인에게 삶은 민간인에게 죽음과 다름없는 것이다.
민간인이었던 파울과 친구들은 신병 교육을 통해 생각이 우위에 있던 정신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조국애는 인격을 포기함으로써 실현된다는 것을 깨닫고, 본능이 생각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생각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는 법을 혹독한 훈련으로 체득함으로써 민간인에서 군인이 된다.
2. 온전치 못한 생각과 본능의 관계
군대에 있는 동안 온전한 군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괴롭지 않으련만. 싸우는 순간을 제외하고 군인들은 온전한 군인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생명과 죽음이 그 어떤 곳보다 가까이 밀착된 상황에서, 생각과 본능은 시시각각 위치 관계를 뒤바꾼다.
싸우는 동안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고, 생명과 직결된 음식과 물건은 본능에 따라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용된다. 상대가 죽으면 그의 소유물은 나의 생명을 부지하는 데 쓰이고, 물건에 담긴 추억 따위의 이력은 철저히 배제된다. 반면, 죽음이 눈앞에서 벌어져도 나의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다시 생각이 본능을 치고 올라온다. 파울은 생각의 수렁에 빠지다가 위험을 인지하고 서둘러 생각을 멈춘다. 한편, 늦은 밤 전진하는 군 행렬을 보며 중세의 기사단을 보는 듯한 낭만을 갖고, 신호탄을 보며 위험하지만 않다면 참 아름다운 불꽃이라는 감상을 내놓는 등 잠깐의 안정을 찾기도 한다. 군인에게 생각이란 없으면 안되지만 결코 본능보다 앞서면 안되는 정신이다.
이렇게 생각과 본능이 엎치락 뒤치락 하며 뒤엉키는 사이 군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잃어간다. 군인은 뭐라도하고 있어야 한다는 행동 강령은 생각을 없애고 본능의 날카로움을 유지하기 위한 경험자들의 조언일지도 모른다. 파울과 그의 친구들은 생각하지 않고 감정을 느끼지 않는 스스로를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존재하지만 살아있지 않은 스스로를 행방불명되었다고 규정한다.
3. 생각과 본능에 밀려 사라지는 존재
이들의 방황은 국가의 명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국가는 군인들에게 명령을 내려 고향에 사는 민간인들을 지킨다. 파울과 전우들은 "국가와 고향은 전혀 다르지만 이들은 떼어놓을 수 없고, 국가 없는 고향은 있을 수 없다"는 대화를 나눈다. 국가와 고향의 관계는 본능과 생각의 관계가 공간으로 치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향에 살아온 민간인들은 국가에 속하지만 국가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국가의 힘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전쟁터로 간 군인들은 국가라는 존재의 절대성,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개인의 희미한 존재감에 무력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삶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전쟁터에서 겪은 죽음 이후의 삶을 고민한다. 파울은 감정과 생각이사라진 전쟁터에서 국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개인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직업인 '죽임'에 의해 명을 다한 프랑스인의 직업인 '인쇄공'의 삶을 이어받는 것으로 죽음 이후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후로 이어지는 전우의 죽음, 그리고 본능이 생각을 압도하는 순간들이 반복되며 삶에 대한 생각들은 점차 옅어진다.
결국 전우들을 모두 잃은 채 홀로 남은 파울은 짧은 순간이나마 붙잡고 있던 삶의 목적을 잃고 만다. 역설적으로, 파울은생각과 감정이 막혀버린 동시에 편안함을 느낀다. 마침내 그는 감정보다는 합리성을, 생각보다는 그 이전의 본능을 따르는 진정한 군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도 잠시, 파울은 얼마 뒤 생각도 본능도 잃어버린 죽은 사람이 되고 만다. 두정신의 지리멸렬한 혼란 속에서, 개인이 살아있는 인간으로 존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