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와다 요코 『목욕탕』, 『용의자의 야간열차』 독후감
[개요]
일본인 다와다 요코는 독일어와 일본어 두 언어로 글을 쓰며 언어 사이의 공간을 부유한다. 작가는 대학 졸업 후 회사 일로 독일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처음 유럽으로 갔던 경험이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언어 체계의 특성을 살린 글을 쓰며 한 언어에 정신이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고, 그런 의식은 초기작인 『목욕탕』에서 몸, 비늘, 경계, 물, 뱀과 같은 유동적이고 이질적인 모티프로 드러난다. 그보다 10여년 이후에 출간한 『용의자의 야간열차』는 경계와 언어라는 그녀의 주된 작품 주제가 열차라는 시공간에 빗대어 표현된다.
사람은 각자 다르다. 서로서로 다르고, 스스로도 다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서로 다른 감정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크고 작은 공동체에 속해 살아가는 우리는 공동체를 유지해야 한다는 목표 하에 스스로를 공동체의 기준에 일치시킨다. 작게는 가족에서부터 크게는 학교, 동네, 회사, 국가라는 공동체에 자신을 맞춘다. 사람은 늘 변화하는 존재인데 사람이 만든 것들은 고정적이며, 우리 스스로 고정적으로 되고자 한다. 정상적이라고 규정되는 사람들은 최소한 몇군데의 공동체에 동시에 속해 있고, 그런 우리들은 각 공동체를 위한 고정성의 집합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 사는, 20대의, 회사원인, 여자. 각 공동체의 집합은 나를 보지 않고도 나를 상상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틀을 만들어낸다. 물리적 공동체 뿐만 아니라 같은 말,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개념을 사용하는 언어적 공동체 역시 존재한다. 이런 고정성이 모여 다른듯 비슷한 개인을 만들어 낸다. 대화의 공동체 안에서개인은 나, 너, 그/그녀라는 대명사로 불리게 되는데, 『목욕탕』과 『용의자의 야간열차』는 관계 속에서 나의 위치를 고정시키는 대명사를 통해 역으로 고정된 것들의 경계를 허문다.
-
『목욕탕』: 유한한 나-영원한 그녀
'나’는 매일 사진 속 내 모습과 일치하도록 거울 속의 실제 얼굴을 화장한다. 컨디션이 좋건 나쁘건 화장품을 발라 얼굴을 항상 일정하게 고정한다. 하지만 나의 맨 얼굴은 사진과 다르다. 죽은 사람처럼 핏기가 없다. 사진 속 나와 거울 속 나는 한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 같다. 그래서 나는 ‘너’냐고 묻는 크산더의 물음에 아니라고 답한다. 크산더가 생각하는 나는 크산더의 나일 뿐 나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와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크산더는 과거에 나를 사진 찍어주면서 나를 ‘크산더의 나’로 만들었다. 나는 나를 영원히 붙잡으려는 카메라가 무서웠다. 그래서 처음 찍은 사진에서 나는 인화되지 않았다. 나는 크산더가 생각하는 일본인 여자 공동체로서의 자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크산더는 그런 나를 탓하며 나의 얼굴을 전통적인 일본 여성의 얼굴로 화장했다. 크산더는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피부나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사람들을 공동체의 집합으로만 본다. 공동체에 고정되기 이전의 것을 그는 보지 못한다. 결국 크산더의 생각대로 나는 한 일본 여자의 모습으로 종이에 현상되었다. '크산더의 나'는 크산더의 생각 속에서 영원하다. 크산더가 생각하는 나, 내가 생각하는 크산더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다른 존재다.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존재와의 관계는 온전한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하는 우리는 3인칭으로 대화한다. 서로의 연인은 그 자리에 없으니까.
어느날 일을 하다가 쓰러져 어떤 여자가 나를 구했을 때, 나는 그녀에게 나의 혀를 빼앗겼다. 혀를 빼앗기는 것은나의 언어, 즉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다. 혀는 나의 언어적 공동체를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처음 크산더를 만나 그에게 독일어를 배우며 '크산더의 나'가 되었던 나는, 시간이 흘러 나를 구해준 여자 덕분에 크산더로부터도 구해진다. 그 여자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내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 여러 그림자를 갖게 되고 몸에 아름다운 비늘이 돋아나며 죽음과 가까워진다. 의문의 여자를 만난 후 거울 속 내 모습이 크산더가 찍어준 사진과 똑같이 생기있어 보였을 때, 나는 역으로 핏기 없게 화장했다. 그리고 사진을 찢었다. 나는 더이상 크산더에게 나를 고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크산더가 다시 ‘너니?’라고 묻는 질문에 나는 ‘그래, 너야.’라고 답했다. ‘너’는 크산더의 머릿속에 있는 나일 뿐이니까. 나는 이제 그가 하는 말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얼마 후 일본의 엄마를 찾아간 나는 일본어로 엄마를 부르고, 나를 '나'로 지칭하는 낯선 말들을 말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낯설어 한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낯선 말들로부터 나는 어떤 언어에도 온전히 속해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자유로워진 나는 매일 밤 의문의 여자를 만나기 위해 투명하게 화장을 하고, 밤마다 그녀와 하나가 된다. 나는 일본어에서도 독일어에서도 벗어났고, 카메라의 영원성에서도 벗어나 무엇이든 흘려보내는 유한한 존재가 된다.
-
『용의자의 야간열차』: 머무는 나-떠도는 당신
'당신'은 고정적이지 않은 시공간에 머물며 공동체로부터 떨어진다. 시계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 단위와 지도에 설정된 공간 단위는 공동체를 잘 운용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사람들이 같은 기준을 공유함으로써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언제까지 어디에 도착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다. 그 목표를 위해 교통수단은 고정된 경로와 시간을 준수한다.
그런 교통수단에 변수가 생겼을 때, 당신은 무척 당황한다. 과거 파리행 버스가 파업을 하고 그라츠행 기차가 지연되자, 당신은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서든 열차를 갈아타든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라츠로 향하는 여행에서 당신은 '열차'가 가진 유연한 매력을 발견한다. 출발지와 도착지는 같아도 다양한 궤도로 열차를 갈아탈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게 당신은 더 오래 전인 학생 시절, 자그레브를 통해 베오그라드로 가는 열차에서'목적지에 닿지 않는 열차', '달리기 싫어하는 열차'에 대해 생각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예전부터 자신이 목적으로서의 열차에 이끌리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 생각해 보면 당신은 동승자가 뿜어내는 광기를 모른 척 견뎌야 했던 희한한 일, 도무지 시간이 줄어들지를 않는 시베리아철도 열차, 양성구유가 되는 꿈을 꿨던 기억까지 어른이 된 후에도 예측불허한 일들이 자꾸만 생기는 열차를 계속 이용해왔다.
그래서 당신은 오랜만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비행기 대신 일부러 열차를 탄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여정에서 당신은 계속 열차를 이용한다. 불편하더라도 관 같은 침대에 누워 열차의 덜컹거림과 동승자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당신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며 열차를 갈아타는 사이의 시간도 자유롭게 부유한다. 가장 최근, 연출자의 성격을 못참고 뛰쳐나왔을 때도 당신은 비행기가 아닌 열차를 선택한다. 급작스러운 선택에서 고정적인 비행기 보다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열차에 무의식적으로 끌렸을 것이다.
이렇듯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새 계속 열차에 타고 있는데, 사실 당신은 오래 전 뭄바이로 가는 열차에서 당신의 손톱깎이와 영원한 승차권을 교환했다. 끝없이 자라나는 손톱을 손톱깎이로 자르는 행위는 나의 몸을 공동체의 기준에 일치시키는 행위다. 하지만 당신은 손톱깎이를 내어주고 영원한 승차권을 받음으로써 공동체에 정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당신은 열차 안에서 늘 관찰하는 존재로 머문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일의 당사자가 되어 주도하려 하지 않고 그저 당신 탓을 하며 수용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당신 스스로와의 관계에서도 당신은 고정된 내가 아니라 바깥에서 나를 관찰할 수밖에 없는 당신이 되었다.
열차에 탄 사람들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지만 각자 다른 목적지로 향한다. 같은 장소가 누군가에게는 종착지가 될 수도 누군가에게는 환승지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오래 머물지만 누군가에게는 스쳐지나가는 곳일 수도 있다. 열차 여행은 목적도 시간도 경로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그 모든 사람을 태운 열차가 향하는 곳은 결국 ’어디에도 없는 마을‘이다.
-
『목욕탕』에서 고정성은 영원함으로 비유된다. 반면 죽는 것은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목욕탕』은 1인칭과 3인칭의 관계로 ‘영원함’이라는 고정된 시간을 허문다. 『용의자의 야간열차』에서 고정성은 정주하는 것으로 비유된다. 반면 열차를 타는 것은 정주하지 않는 것으로, 『용의자의 야간열차』는 1인칭과 2인칭의 관계로 ‘정주함’이라는 고정된 장소를 허문다. 두 이야기를 통과하고 나면 우리를 둘러싼 시공간이 허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