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im Jung Oct 06. 2022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배반하지 않기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독후감

트레바리 2회 차 모임의 책은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였다.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독일 현대 소설의 대표 작가로, 1회 차 모임에서 독일 문학에 입문한 뒤 본격적인 독일 문학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작가였다. 책을 읽는 동안 독일인들이 나치 역사를 받아들이며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과 인간으로서 느끼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에 대한 고민이 내내 느껴져서, 독후감은 이 부분에 대한 교훈으로 마무리지었다.


[줄거리]

-1부-

이야기는 미하엘이라는 중년 남성이 자신의 인생에 평생 영향을 끼쳐온 한나라는 여자와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진행된다. 미하엘은 15살 때 길거리에서 갑작스럽게 아팠던 자신을 도와준 30대 중후반의 한나와 연인이 되고,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고 함께 여행을 가는 등 나날이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던 중 어느 날 한나는 말도 없이 사라진다. 이로 인해 상처받은 미하엘은 타인에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2부-

법에 관심이 많았던 미하엘은 법대에 진학해 어느 날 재판을 참관하게 되는데, 나치 전범을 재판하는 그곳에 한나가 피고로 있는 것을 보고 충격받는다. 재판에서 한나는 자신의 필적을 숨기기 위해 필적 확인을 거부하고 모든 죄를 뒤집어써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미하엘은 한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과거 자신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했던 것, 여행을 가서 예약과 주문 같은 모든 행정적인 문제를 미하엘에게 맡겼던 것이 모두 그녀가 문맹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 재판장에게 밝힐지 말지 고민하던 미하엘은 결국 말하지 못하고, 나치 전범을 사랑한 자기 자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다.

-3부-

미하엘은 한나가 감옥에 있는 동안 꾸준히 책을 녹음해 교도소에 보내주었는데, 한나는 미하엘의 녹음을 듣고 해당 책을 빌려 글을 깨우친다. 글을 배운 한나가 미하엘에게 답장을 보냄에도 불구하고 미하엘은 결코 답장하지 않고, 한나가 모범수로서 가석방된다는 교도소장의 말을 듣고서야 한나를 찾아간다. 그러나 한나는 자신을 보는 미하엘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끼고는 결국 석방되기 전날 교도소에서 자살한다. 한나는 자신의 재산을 과거 재판의 증인으로 있었던 나치 피해자에게 전해 달라는 유언을 미하엘에게 남기고, 미하엘은 유언을 따른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배반하지 않기]


이번 책은 한 번 읽어서는 주제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내 의견을 정리하기에 조금 버거웠다. 삶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무거운 사랑이나 윗 세대의 잘못을 안게 된 삶 같은 책의 배경, 그리고 현실적인 재판 상황 모두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은 뒤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를 보고 다시 책을 가볍게 훑어보고 나서야, 처음 책을 읽었을 때 중간중간 막혔던 응어리가 풀렸다.


책에는 종종 원인을 알 수 없는 한나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이 보였다. 미하엘의 낙제를 막기 위해 집에서 나가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두 사람의 여행에서 한나가 미하엘의 얼굴을 허리띠로 내려친 장면이었다. 처음에는 한나의 급격한 감정 변화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책을 끝까지 읽은 뒤 다시 이 부분을 마주하고 보니, 이 장면들은 한나가 나치에 세뇌되었다는 증거 중 하나였다.


2부 재판 과정에서 미하엘은 잔혹한 나치의 만행들을 몇 주간 접하면서 점차 그 범죄 행위에 둔감해진다. 그것을 미하엘은 '마취, 마비'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책에서 이 단어는 공부를 하찮게 여기는 미하엘의 모습에 화가 난 한나가 미하엘을 내쫓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로맨스 소설인 줄로만 알았던 1부에서도 뒷 이야기에 관한 복선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을 깨닫고 소설을 읽으면 한나의 생활 태도 자체가 나치에 의해 잠식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나가 자신의 과거를 자기와 상관없다는 듯이 이야기하거나, 연인 관계라면 묻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미하엘의 질문에 별걸 다 묻는다고 말하는 것,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 태도들은 한나가 한나 슈미츠라는 사람으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치에 의해 정신을 지배당한 한나는 나치가 패배한 뒤에도 마비 상태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그저 살게 되는 대로 살아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는 미하엘이 읽어주는 책을 들으며 짧은 감상평들을 말하고, 그런 와중에 조금씩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깨우쳐 나갔던 것 같다. 그 양분이 쌓여 마침내 한나는 스스로 글을 배운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알게 된 한나는 테이프를 맹인 단체에 기부하고, 교회 사건의 피해자에게 돈을 남기는 등 자기가 직접 결심한 행동들을 하게 된다. 미하엘은 한나에게 애정의 상대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무지에서 벗어나게 해 준 배움의 상대이기도 했다.


한편, 미하엘은 애정으로 시작한 한나와의 관계를 통해 연애, 수치심, 자유, 시대적 범죄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같은 복합적인 고민에 빠지고 이 고민은 미하엘의 인생 전체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 미하엘은 대체로 이 고민의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명하게 해결하지 못하는데, 이 지점에서 독자는 미하엘의 고민을 넘겨받게 된다. 친구들에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거나 재판장을 찾아가 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장면, 한나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는 모습들은 과거의 내가 겪었던 비슷한 경험들을 끄집어내어 나의 잘못을 다시금 곱씹게 했다.


한나와 미하엘은 각자의 잘못 때문에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했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것.' 이 소설이 내게 준 교훈이다.

작가의 이전글 두 개의 수레바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