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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스카토 Oct 26. 2017

나만의 환상적인 자서전을 쓰는 방법

살만 루시디 <한밤의 아이들>

     <한밤의 아이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38년간의 내 인생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단조롭고 소소한 내 인생의 궤적을 불평하려는 건 아니다. 어찌 약 70년 전 인도에서 태어난 살림의 삶과 내 삶의 스토리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여 내 관심은 인생의 빈 공간을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채우려 했던 살림의 야심으로 이어진다. 삶의 빈 공간을 채우려는 시도가 없었음은 물론이요, 그 틈을 채우기 위한 거대한 규모의 상상력도 내겐 없다. 그러니 인생의 서사를 완성하려는 야심이 있었겠는가.  


      갑자기 부족한 야심과 상상력을 언급하며, 소설 속 주인공에게 열등감을 드러내는 이유는 뭔가. 이게 다 약 1,000페이지에 달하는 종이 위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살만 루시디의 현란한 수다 때문이다. 소설은 인도의 독립과 함께 태어난 살림의 회고다. ‘덤덤하게 나를 맞이했던 그 시계들의 어떤 신비로운 횡포 때문에’(1권, P.25) ‘불가사의하게 역사에 손목이 묶어버렸고’(P.26) 그래서 자신의 운명이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이어져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P.26)다고 믿는 살림은 자신이 ‘능동적으로-직설적으로, 수동적으로-비유적으로, 능동적으로-비유적으로, 그리고 수동적으로-직설적으로’(2권 P.8) 세계와 엮어있다고 생각한다. 시작부터 이 얼마나 스케일이 거대한가.


      내가 태어난 해, 한국도 격변의 시기였다. 하지만 겸손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며 자라온 내 상상력은 단 한 번도 나와 세상을 강제로 연결시켜보려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도 갔었고, 최루탄 냄새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시위 현장을 빠져나온 적도 있었으며,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동네 상인들에게 알려주기도 했지만, 내게 삶은 시대와 분리된, 시시하고 지루한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부족한 야심과 상상력에 대한 핑계를 찾아야 한다.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을 지배하는 단 한 장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책상의 앞줄과 옆줄을 편집증적으로 맞추던 순간. 우선 한국의 교육환경에 책임의 일부를 돌려야겠다. 그러니까 내 야심과 상상력은 말살된 측면도 없지 않다.


      반대로 살림의 야심과 상상력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인구와 일곱 번째로 큰 면적을 지닌 인도의 토양에 꽤 큰 빚을 지고 있다. 인구수만큼이나 많은 신을 갖고 있으며 온갖 신화와 상상 위에서 탄생한 인도는 모든 국민들을 이야기꾼으로 만들었으며 (실제 살만 루슈디가 인도에서 강연할 때 한 독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책은 제가 쓸 수도 있었어요. 저도 다 아는 이야기였거든요.’ 게다가 영화는 또 얼마나 많이 만들던가.), 그 결과 살림의 말대로 인도인은 ‘얼핏 보기에는 서로 무관한 듯한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때마다 손뼉을 치며 환호’(2권, P135)하는 ‘연관성에 환장한 사람들’이 됐다. 그 유산이 살림의 야심과 상상력에 젖어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 부족한 상상력과 야심을 애꿎은 조국에 돌렸지만, 사실 한 인도 독자가 살만 루시디에게 던진 질문처럼 우리도 살림스타일의 환상적인 자기만의 자서전을 완성할 수 있다. 우선 시간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게 필요하다. 수다스러운 살림의 회고는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를 만나는 순간에서 시작한다. 위대한 탄생을 강조하기 위한 살림의 의도랄까. 시간의 범위를 확장시키면, 비단 살림만이 아닌 모든 인간의 탄생은 놀라운 우연의 연속 속에서 이뤄진다. 굳이 엄청난 정자의 경쟁을 떠올리지 않아도, 개개인의 인생은 그 자체로 기적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 막내가 자서전을 쓴다면, 지역주의가 팽배했던 시기, 고향 광주를 떠나, 울산 현대 공장에 취업해, 그곳에서 울산 아가씨였던 어머니를 만난 아버지(막내의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혹은 두 분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하지 못했던 외할아버지(막내의 증조 외할아버지)의 쇠한 기력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다.)


      그러다 보면 데이터가 부족해진다. 즉, 기억이 커버하지 못하는 부분이 늘어나게 된다. 나아가 기억의 왜곡이 작동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핵심이다. 즉, 삶의 빈 공간(알지 못하는 부분)과 기억의 왜곡이 실제 내가 살아온 인생보다 내 인생 이야기를 더 환상적이고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살림도 바로 여기에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기대고 있다. ‘나는 쪼가리와 파편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내가 까마득한 옛날에 말했듯이 주어진 몇 개의 실마리를 가지고 빈틈을 메워가는 것이 요령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대부분 우리가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2권, P.387) 자기중심적인 망상도 이야기를 더욱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불완전한 기억의 보이지 않는 창작력이랄까.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기억 속의 진실이죠. 기억 속에서는 기억만의 특별한 현실이 있으니까요. 기억은 선택하고 생략하고 변경하고 과장하고 축소하고 미화하고 헐뜯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현실을 창조하는데, 각각의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복합적이면서도 대체로 일관성이 있는 해석을 내리는 거죠.” (1권, P.445)


       살림은 말한다. ‘나를 이해하려면 세계를 통째로 삼켜야 한다.’ (2권, P303) 마찬가지로 나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먼저 내 인생을 먼저 먹어치워야 한다. 그러다 보면 과연 이 모든 사건이 한 인간에게서 나왔나 싶을 만큼 다채롭고 변덕스러운 사건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는 나 자신은 사실 내가 믿고 싶어 하는 일부에 불과하다. ‘한 인간의 내면세계는 결코 완전하지 않고 결코 균일하지 않아서 온갖 잡다한 것들이 뒤섞여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한 순간에는 어떤 사람이었다가 다음 순간에는 또 전혀 다름 사람이 되기 일쑤다.’ (1권, P495) 그러니 생각해보라. 각각의 개별적 인생에서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뽑아져 나오겠는가. 


      겸손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며, 부지런히 앞 줄, 옆 줄을 맞추던 보잘것없던 내 인생도 한계를 뚫고 한 편의 대서사극이 될 수 있다. 도대체 내가 사는 이유는 뭔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내 삶은 왜 이렇게 초라한가. 나를 위축시키는 이 모든 질문을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살림이 가르쳐주는 자신만의 자서전을 완성하는 일이다. 굳이 거창한 종교나 철학의 말씀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 그건 망상이라고? 좀 망상적이면 어떤가. 지극히 메마른 현실 위에 짓눌려 말라죽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아. 아직 핵심은 소개하지 않았다, 살림이 전하는 효과적인 자서전 쓰는 방법의 요체다.


나는 누구-무엇인가? 내 대답은: 나는 나보다 앞서 일어났던 모든 일, 내가 겪고 보고 행한 모든 일, 그리고 내가 당한 모든 일의 총합이다. 나는 이-세상에-존재함으로써 나에게 영향을 주거나 나의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이고 사건이다. 나는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일어난 모든 일이며 내가 죽은 뒤에도 나 때문에 일어날 모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히 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모든 ‘나’가-즉 지금은-6억-명도-넘는-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모두-그렇게 다수를 포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되풀이한다. 나를 이해하려면 세계를 통재로 삼켜야 한다. (2권,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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