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루가츠키 형제 <노변의 피크닉>
아내의 회사가 사옥을 옮겼다. 이제 우리도 이사를 가야하나. 누군가에겐 사소한 질문이지만, 소심한 아빠에게는 아이의 운명 축을 뒤흔들 수 있는 결정이 될 것 같아 불안하다. 사실 양육은 모든 면에서 비슷한 불안을 내재하고 있다. 내 작은 결정이 한 인간의 인생을 바꿔놓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육아의 불안 밑에는 미스터리한 강이 무심하게 흐르고 있다. 인생의 강.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지, 왜 저 방향으로 흐르는지, 내 선택과 강의 흐름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건지. 이성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게 없기에, 우리는 불안하다. 하물며 내 인생이 아닌 남 인생의 초반부를 책임져야 하는 부담감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SF소설 속 설정은 은유와 상징으로 해석되기 쉽다. SF작가들이 어쩌면 경계하는 부분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러시아의 대표 SF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노변의 피크닉>은 미스터리한 인생의 은유로 다가온다. 외계인이 지구를 짧게 방문하고 떠났다. 그들의 흔적이 지구에 남았다. 그곳에선 인간이 알아낼 수 없는 온갖 현상이 발생한다. 외계인의 방문지를 구역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욕망은 구역으로 몰려들었다. 학자의 지적 호기심부터 밀수꾼의 물질적 욕망까지. 그들의 방문은 지구의 물리적 법칙을 흔들었다. 변화는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인간의 심리적 토대마저 뒤흔들었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지난 13년뿐 아니라, 인류가 존재한 이래 가장 중요한 발견은 방문이라는 사실 자체입니다. 방문자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왜 그렇게 잠깐 머물렀는지, 그 후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류가 우주의 외로운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분명히 알게 됐다는 게 중요하지요. 앞으로 이 이상 근본적인 발견을 해낼 운은 외계문명연구소에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P.18-19)
폴란드의 SF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은 ‘인지적 보편주의라는 우리의 미신’이라고 지적했다. 베이컨이 꼽았던 '종족의 오류'와 비슷한 설명이다. 인간의 이성이 우주적인 보편성을 지닌다는 전제 아래 우주와 외계인을 해석한다. 인간의 과학과 논리 법칙을 이용해 외계인의 방문 목적은 물론, 구역의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우연하게 해석되는 사실도 있다. 하지만 그건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현미경으로 못을 박고 있는 꼴’(P.239)과 다르지 않다. 밸런타인 박사의 외계인 피크닉 가설이 설득력이 높은 이유다. 인간의 우연한 피크닉을 바라보는 숲의 동물들을 떠올려보라. 숲에 남아있는 피크닉의 흔적들에서 어떤 목적과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겠는가.
“피크닉 말입니다. 숲. 시골길, 풀밭을 떠올려 봐요. 차가 시골길에서 풀밭으로 들어가고, 차에서 젊은이들이 내리고 술병들, 음식이 담긴 바구니들, 아가씨들, 트랜지스터 라디오, 카메라들이 나옵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텐트가 세워지고 음악이 흐르지요. 그러다 아침이 되면 이들은 떠납니다. 밤새 공포에 떨며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던 동물과 새, 벌레들이 자기 피난처에서 기어 나옵니다. 그때 이들이 보게 되는 건 뭐겠습니까? (P.231)
“그렇지만 박사님의 피크닉 가설로는 그 소동을 설명할 수 없죠.”
“왜 설명이 안 됩니까?” 밸런타인이 반박했다. “한 꼬마 숙녀가 아끼는 태엽 곰 인형을 풀밭에 깜빡 두고 갔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P.234)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구역을 해석하지 못한다. 무지는 공포를 낳는다. 인간에게 구역은 공포의 대상이다. 알 수 없는 실체 앞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보편적인 행동은 무엇일까. 모방이다. 남들과 비슷하게 행동하기. ‘어딜 가든 누구와 무슨 얘기를 하던 구역, 구역, 또 구역이다.’(P.97) 공포의 대상은 곧 관심의 블랙홀이 된다. 모든 욕망과 생각을 끌어당긴다. 모든 관심사는 구역의 지배 아래 놓여있다. 구역이 발견된 시골 도시 하몬트는 오늘날의 뉴욕과 비슷하다. 모든 욕망이 집결된 공간이다. 불나방처럼 성공에 이끌려 하몬트로 몰려들지만, 미스터리한 구역 앞에서 성공에 도달하기 위한 공식 루트는 없다.
구역은 삶의 은유다. 우리의 모든 욕망은 삶을 향하지만, 우리가 아는 삶의 법칙은 전무하다. 권선징악? ‘당신이 악인인지 선인인지 아무 관심이 없는’(P.54) 구역처럼 삶도 마찬가지다. 때론 내 인생을 엿 먹이려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기대 못한 행운들이 이어진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뭘 믿지 말아야 할까요. 통계? 아니면 상식?’(P.246) 삶의 불안 앞에서 우리의 행동은 움츠러든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가장 주류적인 생각과 욕망을 학습한다. 불안이 자유를 잠식한다. 구역이 지배하는 하몬트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레드릭을 빼고는 모두가 똑같이 사고하고 욕망한다.
다시 육아로 돌아오자. 부모라고 해봤자 30, 40대의, 방황하는 인간이다. 내 인생도 아는 게 없어 제대로 못 풀고 있는데, 어떻게 아이 인생의 바른 방향을 설정해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대세에 휩쓸린다. 주류의 정답을 쫒는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사교육에 대한 합리적 비판도 내 아이의 미래 앞에선 사그라진다. 모든 부모에게 육아는 하몬트의 구역이다. 내 모든 관심사를 끌어가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현미경으로 못을 박으면서도, 내 옆의 또 다른 바보를 보며 위안을 찾을지 모른다. 혹시라도 원치 않는 결과가 벌어지면, 열심히 과거를 뒤지며 원인을 찾는다. 역시나 엉뚱한 선택을 원인으로 지목하여 괴로워할 테니, 아이의 생활 터전을 옮기는 이사가 쉽겠는가.
주인공이자 구역 물품 밀수꾼 (스토커라고 부른다) 레드릭은 누구보다 구역을 많이 들어갔던 인물이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구역이란 인생과 부딪히며, 감각과 본능으로 구역의 위협을 피해갔다. 어차피 구역을 아는 인간은 없다. 잘난 체하는 학자들도 자기들이 만들어낸 이론을 방패 삼아 불안을 피하고 있을 뿐이다. 모두가 모르긴 마찬가지다. 바꿔 말하면 정답은 없다. 누군가의 삶을 모방하는 것의 유일한 장점은, 망했을 때 함께 위안받을 사람이 있다는 정도? 그래서 레드릭은 결정에 거침이 없다. 매 순간 자신의 촉을 따르며 판단 내리고 행동한다. 하지만 그 역시 마지막 구역 침투에서 깨닫는 사실은 참혹하다.
당신들은 내가 장단 맞추게 만들었고, 일생 동안 나를 질질 끌고 다녔는데, 나란 머저리는 내 의지대로 살고 있다며 우쭐해했다. 당신들은 맞장구쳐 줬고, 추잡한 당신들은 신호를 주고받으며 내가 똥통에서, 감옥에서, 술집에서 춤추게 하고, 끌어내고, 끌고 다녔지. 이젠 충분하다! (P.314)
자유로운 삶은 결심하기도 힘들지만 실행은 더 힘들다. 구조와 시스템 탓이다. 이제 절망의 밑바닥까지 내려왔다. 정리하자면 인생 앞에서 인간의 이해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선 끊임없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정답을 선택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정답이라고 믿는 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은 구조와 시스템이 조종해낸 결과일지 모른다. 때문에 자신이 도출한 정답의 기준이 필요하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정답을 고를 수 없으니,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믿음대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을 잡아야 할까.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구역의 금빛 구체 앞에서 외쳤던 레드릭의 바람에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
모두에게 행복을 드려요! 공짜로 드려요! 기분 상한 채로 돌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P.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