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처음 입사해서 만난, 마흔 직전의 선배가 그랬다. ‘나이 드니까 자서전이나 평전을 계속 찾게 되더라고.’ 20대 중반에는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지만, 지금은 그 말이 뼈에 닿는다. 인생의 중간 지점을 통과하고 나니 문득 궁금해진다. 난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때문에 삶의 트랙을 제대로 완주했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의 인생이 궁금하다. 특히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삶이 선사한 무작위적 혼돈 앞에서 어떻게 대처했을까. 생의 갈림길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삶에 내재한 우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임기응변을 발휘하며 대처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가끔, 인생은 자발적으로 고를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선물하기도 한다.
프리모 레비의 자서전을 선택했다. 프리모 레비. 이탈리아의 화학자지만,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통해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생생하지만 건조한 문체로 기록했다. 인간 본성은 극한의 상황에도 바뀌지 않는다고 했던가.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도, 화학자로서의 차분함과 정확성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경험을 한 편의 사회학적 실험으로 분석해냈다. 자신의 기록을 ‘인간 정신의 몇몇 측면에 대한 조용한 연구에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평했던 레비는, 하지만 70세가 되기 전 자신이 살던 4층 아파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아우슈비츠를 견뎠던 생명력은, 삶을 버텨내지 못했다.
<주기율표>는 자신의 인생 사건을 화학 원소 기호의 특징에 비유해 풀어낸, 한 편의 소설 같은 자서전이다. (실제 레비의 단편이 들어있고, 가상의 인물도 등장해서, 신사실주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화학은 변화의 학문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원소들을 재조합해, 세상에 없던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낸다. 때문에 종종 화학은 변화무쌍한 인생의 은유가 된다. 동시에 각 원소의 화학적 성질은 삶을 구성하는 다채로운 특징을 대변할 수 있는데, 화학자이자 소설가인 프리모 레비는 바로 그 지점을 포착해, 다채로운 화학적 사건으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묘사해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부드럽고 예민하며 산에 고분고분해서 한 입에 먹히는 아연도 불순물 없이 아주 순수한 경우에는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럴 경우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충돌하는 두 가지 철학적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악에서 지켜주는 보호막 같은 순수함에 대한 찬미와, 변화를 일으켜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불순함에 대한 찬미가 그 둘이다. 나는 메스꺼울 정도로 도덕주의적인 첫째 것을 버리고, 내 마음에 드는 둘째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꾸물거리고 있었다. (P.51-아연)
아우슈비츠에서 버텼을 정도로 강인한 생명력은 어떻게 한 순간에 소진됐을까. 대학시절 유럽을 휩쓸었던 인종주의와 파시즘의 궤변 앞에서 레비는 순수하고 명확한 진리에 사로잡혔다. 온갖 ‘정신’이 시대를 지배하던 때, 레비는 ‘물질’의 핵심으로 파고들기로 했다. 화학자가 된 것이다. 해답에 대한 갈망은 곧 생명력의 정수가 되었고, 그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인간 정신을 탐구하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지옥을 견뎌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밥벌이의 고단함을 면제해주진 못했다. ‘가난하다는 것은 불행하다’는 주석 챕터의 첫 문장처럼, 프리모 레비는 화학자로 평생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대학만 들어가면, 취업만 하면, 혹은 눈앞에 가파르게 펼쳐진 봉우리만 넘으면, 쾌적한 산행이 기다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힘들게 넘었던 봉우리들은 그저 작은 동산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고개를 넘고 넘어도, 고개가 계속 이어진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삶의 에너지를 소진한다.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와도, 프리모 레비는 평생 입에 풀칠하기 위해, 영업을 뛰고, 고객 응대 전화를 받으며, 거래처에 불량품 교환을 신청해야 했다. 정신없이 밥벌이에 투신하면서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억눌러야 했다. 험난한 봉우리의 연속. 전쟁 시절의 기억으로 허풍 떠는 고객을 만난 후,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그가 부러웠다. 나는 상담직원의 그물망에 얽혀 있고, 사회와 회사에 대한 의무, 또 그와 유사한 의무의 망에 갇혀있다. 하지만 그는 장벽을 허물고 과거의 주인이 되어 그것을 자기 마음에 맞게 세워놓고 그 주위에서 영웅의 옷을 꿰매고 슈퍼맨처럼 과거를, 자오선을, 위도선을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의 자유, 무한한 창작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런 그가 부러웠다. (P.289-우라늄)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본다. 70을 앞두고 진리를 찾아냈을 수도 있겠다. 진리를 발견하는 순간 진리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는, 진리의 역설. 하지만 그보단 누적된 노동의 피로, 사라지지 않는 아우슈비츠의 악몽이 그의 생명력을 소진한 건 아닐까. 평생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모든 독일인이, 아니 모든 인간이 답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아우슈비츠의 전쟁은 어쩌면 평생 지속됐을지 모른다. 진리에 대한 열망과 노동 과정에서 느끼는 작은 희열로 삶이라는 전쟁의 순간을 간신히 버텨냈을 수 있겠다. 그 작은 희열의 합이 너무나 작아졌을 때, 스스로 삶을 끝낸 건 아녔을까.
험난한 산행 중엔 그저 아래만 바라보며 묵묵히 걷는 게 도움이 된다. 가끔 하산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올라가야 해요?’라고 묻는 순간 간신히 숨겼던 피로감이 몰려온다. 어차피 밥벌이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은 프리모 레비의 발자취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때문에 시선을 삶의 먼 미래가 아닌, 지금 내 발 밑으로 돌려야 한다. ‘미분 계산의 엄숙한 질서 속으로 처음 걸어 들어갔던’ 강렬한 기쁨을 기억하는 일, ‘무게를 달고 나누고 측정하고 어떤 실험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화학자의 일’에 집중하는 것. 인생이 피곤해질 때 떠올려야 할 프리모 레비의 작은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