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육아의 초심을 유지하는 방법

조지 손더스 <바르도의 링컨>

by 알스카토
나는 대통령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가장 깊은 조의를 표했다.
그는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어떤 어두운 것에 놀라 그의 얼굴에 갑자기 불이 밝혀졌다.
윌리가 죽었소. 그가 말했다. 마치 그 생각이 방금 떠오른 것처럼. (P.417)


아들이 죽는다는 것. 어렴풋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스라치게 괴로운 일. 상상이 혹여나 실제 현실에 영향을 끼칠까 싶어 떠올리지도 않으려는 생각. 조지 손더스의 <바르도의 링컨>은 둘째 아들을 장티푸스로 잃은 링컨 대통령의 이야기이자, 아들의 영혼, 그리고 영혼의 친구들에 관한 소설이다. 바르도는 우리로 치면 이승과 저승의 사이, 그러니까 한(恨) 때문에 차마 눈을 감지 못한 영혼들이 머무는 장소다. 손더스의 작품은 여러 영혼들의 목소리를 통해 인생의 다층적인 단면을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아이 셋의 아빠인 나는 아무래도 아들의 죽음과 그 상실에 관한 링컨의 슬픔에 집중하게 된다.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에 등장하는 외계인, 트라팔마도어인의 시야가 떠오른다. 트라팔마도어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은 지금의 행운에 크게 기뻐하지도, 슬픔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현재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인간의 시야는 한정적이고, 이러한 한계는 육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아이의 모습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 때문에 지금의 아이 모습을 더 오래 눈에 담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애써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오히려 아이를 돌보는 것의 기쁨 따윈 잊게 되고, 공무원이 행정 문서를 작성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아이를 돌본다. 육아가 노동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이를 고정되고 안정되었다고 보고 내가 영원히 가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했어. 아이는 절대 고정되지도 안정되지도 않고, 그냥 덧없는 일시적인 에너지의 분출일 뿐이었어. 나는 이것을 당연히 알 수 있었어. 아이가 태어나서는 이렇게 보이고, 네 살 때는 저렇게 보이고, 일곱 살 때는 다른 식으로 보이고, 아홉 살 때는 완전히 새롭게 바뀌지 않았던가? 아이는 한 번도 똑같이 머무는 적이 없었어. 심지어 잠시라도. (P.348)


위의 후회는 아들을 잃은 링컨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일시적인 에너지의 분출’인 아이들은 매 순간 변해간다. 바꿔 말하면, 우린 매 순간 아이들의 현재 모습을 잃어간다. 그 모습을 어떻게든 지켜보고자 사진을 찍어대지만, 그럼에도 남는 건 멈춰버린 2차원의 이미지일 뿐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아내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자 글을 남기기도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부질없는 일이다. 조그만 기억의 창고 속에 넣어둘 몇 가지 순간을 빼면, 결국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다. 기억할 수 없다면, 아이와 함께하는 지금의 순간을 최대한 느끼려고 애를 써야 한다. 순간의 행복을 온몸의 감각으로 음미해야 한다. 윌리의 바르도 친구이자 자살한 영혼 로저 베빈스 3세가 팔목을 칼로 그은 직후 세상을 바라보며 느꼈던 것처럼.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제야(말하자면 문밖으로 거의 나오고 나서야)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지, 우리의 쾌감을 위해 얼마나 정확하게 설계되었는지 깨달았고, 내가 놀라운 선물, 이 광활한 감각의 낙원, 모든 숭고한 것이 어여쁘게 완비된 이 훌륭한 장터를 매일 거닐어도 좋다는 선물을 그냥 내버릴 찰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그 숭고한 것들이란 비스듬히 비쳐 드는 팔월의 햇빛 속에서 춤추는 곤충 무리, 눈밭에 무릎까지 빠진 채 머리를 맞대고 서있는 검은 말 세 마리, 쌀쌀한 가을날 바람에 실려 오렌지 색조의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쇠고기 수프의 향기..... (P.41)


장인어른은 술만 드시면 아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제주도 지점장 시절을 떠올린다. 그 시절의 이미지가 아버님의 대표 행복 이미지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처럼. 미취학 아동 셋에게 허우적거릴 때면, 주변 선배들은 모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때가 좋은 거야.’ 그리고 덧붙인다. ‘그땐 몰랐는데, 되돌아보니 그래.’ 아들의 상실 앞에 선 아버지의 슬픔을 차마 상상하지 못한(상상하기 싫은) 독자는, 대신 아이의 유년 시절 상실로 공감을 대신했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프다.) 일상의 무게에 짓눌린 경험의 감각을 되살려보려 애썼다.


아내는 감기로 어린이집을 결석한 막내와 단둘이 햄버거를 먹고, 산책을 한 뒤, 이렇게 적었다. ‘요즘 내 머릿속 “행복”의 대표 이미지는 햇빛이 좋은 봄날, 한가한 오후에 아기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다. 육아휴직 때 종종 그랬었는데, 요새도 가끔 그때의 온도와 냄새가 생각나는 느낌이다.’ 나는 뭐가 떠오를까. 농구선수 하승진이 떠오를 것 같다. 세상을 ‘누가 가장 큰가’라는 척도로 해석하는 둘째에게 221cm의 장신센터 하승진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 틀이다. 나와 나누는 대화의 20%가 하승진 질문이다. 저건 하승진보다 큰가? 하승진은 한강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승진은 손이 저기에 닿을까 등등. 하승진 질문을 할 때면 진돗개처럼 생긴 둘째의 입이 씰룩거리며 장난꾸러기 미소를 띤다. 시간이 지나면 몹시도 그리워하게 될 이미지다.


썰물은 나갔지만 밀물은 결코 들어오지 않았지, 수재나 브리그스가 말했어요.
돌들이 아래로 굴러 내려갔지만, 결코 다시 굴러 올라오지는 않았어. 신시아 호인턴이 말했어요. (P.136)


시간의 일방향성을 잊지 않는 것. 아이는 ‘일시적인 에너지의 분출’ 임을 기억하는 것. 이는 관성적인 시선을 극복하고,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의 행복을 오감으로 느끼도록 각성시켜주는 일종의 육아 메멘토 모리이자 동시에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을 유지시켜주는 경고문이다.



201811081471033200_7.jpg 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정영목 역/ 문학동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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