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cio e Pepe
양치기 목동들의 간단한 새참에서 유래한 카쵸 에 페페는 라치오 지방의 가장 오래된 파스타 레시피 중 하나이다. 몇 번의 연습 끝에, 드디어 내가 원하는 소스의 질감이 나와주었다. 기름 한 방울 없이 면수만 가지고 치즈를 유화시켜 크림처럼 만들려니 어렵다. 온도가 낮으면 섞이질 않고, 온도가 높으면 피자치즈처럼 굳어서 늘어진다. 재료의 온도와 물성을 완전히 지배하고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하는, 그야말로 최고난도의 파스타 중 하나이다.
한편 현지에서는 대략 우리나라의 간장계란밥 정도의 위상을 지니는데, 반찬 없을 때 집에서 대충 만들어 먹는 정통 카쵸 에 페페의 비주얼은 대개 3, 4번째 사진과 같다. 즉 애초에 난이도를 따지고 자시고 할 건덕지도 없는 가장 간단한 집밥의 일종이다. 그러나 간장계란밥도 미슐랭 한식당에서 만들면 다르듯, 요즘은 좀 더 파인한 카쵸 에 페페가 유행한다. 두툼한 토나넬리나 키타라 면을 사용하는 건 같지만, 크리미하고 리치한 소스의 풍미와 질감을 한껏 살려 만든다. 마치 카르보나라에서 달걀과 관찰레만 뺀 듯한 느낌이다. 이처럼 전통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정통은 시대의 욕구를 반영하여 시시각각 변화한다.
이탈리아어에서 치즈를 뜻하는 좀 더 보편적인 단어는 Formaggio이다. 불어 Fromage와 마찬가지로 라틴어 Formos가 어원이다. 틀에 넣어 형태를 굳힌다는 뜻으로, 영어의 'Form'이라는 어근도 여기서 유래했다. 한편 Cacio는 라치오를 비롯한 중부 및 남부지방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방언인데, 치즈를 뜻하는 라틴어 Caseus가 어원이며 'Cheese'역시 어원이 같다. 따라서 '카쵸' 하면 보통 양젖(페코리노)으로 만든 경성 치즈, 대표적으로 페코리노 로마노 등을 의미한다.
즉 페코리노 로마노를 포르마지오라고 하는 경우는 있지만, 북부 지방의 치즈인 고르곤졸라 등을 카쵸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카쵸 에 페페는 그 이름에서부터 출신지를 유추할 수 있는 파스타 중 하나인 것이다. (비슷한 예로, 알리오 에 올리오 역시 로마에서는 아이오 에 오이오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극도의 형식적 제약 속에서 재료의 단순합을 초월한 맛이 창발되는 카쵸 에 페페의 변증법적 미학을 나는 매우 좋아한다. 음악으로 치면 소나타 양식에 비유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