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하종 Jun 10. 2021

2021년 이한열이 바라는 기후정의

6월 민주항쟁 34주년을 맞는 한 20대 청년의 외침

기후위기는 매우 시급한 문제임에 비해 지금껏 잘 다뤄지지 않았던 의제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2018년,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가 시작한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 미래를 위한 금요일 운동은 세계 청소년들에게 퍼져나갔고 2019년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코로나19 팬데믹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P4G 서울 정상회의' 개회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출처 : 한국경제)

뒤늦게 우리나라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했고 국회는 기후위기 비상선언을 통과시켰습니다. 지난 5월 30일 서울에서 P4G 녹색미래 정상회의를 개최하며 기후위기 선도국을 자처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강원도와 춘천시는 국가 계획보다 10년 앞서는 2040 탄소중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언뜻 보면 순차적으로 착착 잘 진행되어 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숨기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후위기는 산업혁명 이후 200년간 꾸준히 탄소가 배출된 결과가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살아 있는 우리 세대가 사는 동안 탄소 배출이 급증했기 때문입니다. 


인구와 경제 규모, 에너지 소비 등의 지표가 1950년대 이후로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산업혁명 이전에 비해 현재까지 지구 평균온도가 1.1도 올랐다고 하는데 그중 절반 이상은 1950년대 이후 올랐습니다. 더욱이 여러 조사 연구에 의하면 전 세계 소득과 자산 분포에 비례해 이 위기에 책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15년 옥스팜에서 조사한 전 세계 인구의 소득 분위별 온실가스 배출량을 보면 상위 10% 소득 계층이 소비 기반 배출량의 대략 50%를 차지합니다. 이와 비교해 하위 50% 소득 계층의 배출량을 다 합해도 대략 10%에 불과합니다.

출처 : 기후정의(한재각, 한티재)

기후위기는 ‘불평등’ 위기입니다. 위기를 초래한 온실가스 배출 책임뿐 아니라 위기로 인해 받을 피해마저 불평등합니다. 푹푹 찌는 폭염에도 목숨 걸고 밖에서 일해야만 하는 노동자, 최장 기간 장마와 홍수로 평생 일군 터전을 모조리 잃은 농민, 고시원 쪽방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못해 열대야를 피하려 24시 카페에서 밤을 지새워야 하는 청년들. 이처럼 기후위기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은 모두 온실가스 배출 책임이 가장 적은 계층입니다.


그런데 정작 기후위기에 대한 책임을 더 많이 느껴야 할 선진국과 부자들은 그들이 가진 힘을 내세워 책임을 회피할 뿐 아니라 위기조차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량 1위를 자랑하는 포스코는 산업부가 마련한 K-ESG 지표 평가에서 최상위 등급인 A등급을 받는가 하며 너도나도 친환경을 내세우며 초록 옷 하나씩 장만해 걸쳐 입고 으스대는 모습이 참으로 꼴사납습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산업구조와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코로나19로 영세 자영업자, 노동자들이 경제적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보다 더 강한 강도로 탄소 배출을 줄이고자 한다면 더 비극적인 일들을 견뎌내야만 합니다. 석탄화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발전노동자들은 어떤가? 아무도 발전소 폐쇄 시기를 설명해 주지 않아 언제 해고를 당할지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정의인가요?


기후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입니다. 대통령이 2050 탄소중립을 선언했지만, 탄소중립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대중은 얼마나 있나요. 한국의 그린 뉴딜은 왜 이토록 인기가 없을까요? 이 모든 과정에서 ‘시민’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정부와 기업이 주도하는 기후위기 대응은 시민의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위기를 만들어왔거나 이에 동조했던 이들이 과연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가장 오랫동안 가장 큰 피해를 볼 소위 1020 ‘미래세대’에게는 정작 본인들이 살아갈 미래의 제도와 정책을 결정하는 데 어떤 권한이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데 말입니다.


시급한 문제를 당장 해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당사자 주체들이 빠진 기후위기 대응은 기후 파시즘 또는 생태 권위주의에 빠질 우려가 다분합니다. 이 때문에 민주적이고 계획적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가장 시급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시민이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실천을 계획하며 갈등을 스스로 조정해나갈 수 있도록 숙의와 민주주의 확대의 장을 넓히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또한 그 전환의 과정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함께’ 가는 과정으로 기획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청년들이 바라는 정의로운 전환, ‘기후정의’입니다. 6월 민주항쟁 34주년을 맞은 지금, 2021년의 청년이 바라는 ‘기후정의’는 아마도 87년 6월 이한열이 열망했던 그 세상과도 결코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5월 30일,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가 있던 날 전국 5개 지역 대학생들이 일제히 기후비상행진을 벌였다. (자료제공 : 대학생기후행동 강원지부)

https://www.youtube.com/watch?v=pda57v4HbMc

매거진의 이전글 기후환경교육은 기후행동이 아니다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