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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택시 뒷좌석의 불빛

움직이는 방에서 흔들리며 읽기

by 김하종

비가 올 듯한 저녁, 택시 문을 닫자 작은 방 하나가 나에게 주어진다. 좌석은 미지근하고, 안전벨트 금속 끝이 무릎에 살짝 닿는다. 앞좌석 뒤 주머니의 접힌 영수증 몇 장, 플라스틱 냄새와 옅은 방향제가 섞인 공기, 라디오의 낮은 사설. 운전석 옆 내비 화면이 푸른 빛을 품고, 그 빛이 천장 조명과 만나 안쪽으로 번진다. 나는 창가 쪽에 몸을 약간 기울이고 책을 꺼낸다. 달리기 위한 방이 아니라, 달리면서 잠깐 앉아 있을 방. 택시는 그렇게 하나의 읽을 장소가 된다.


차가 움직이면 나는 먼저 시선을 고정한다. 문 손잡이의 작은 나사, 컵홀더의 둥근 테두리, 앞좌석 헤드레스트의 바느질 선. 그중 하나를 골라 본다. 고정점 하나—한 줄—쉼. 이 세 동작이면 충분하다. 흔들림을 거부하거나 밀어내려 하지 않는다. 밀어낼수록 더 크게 흔들릴 테니까. 대신 흔들림이 지나가는 길 가장자리에서, 문장 하나를 잠깐 앉혀 본다.



신호가 길어지는 교차로에서 첫 문장을 집어 든다. 와이퍼가 유리를 가로지르고, 비가 아닌 먼지의 선이 분할선을 만든다. 책의 모서리를 엄지로 살짝 눌러 각을 준다. 길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과, 한 줄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한 화면에 겹친다. 차가 출발하면 책을 아주 조금 덮고, 속도가 안정되면 다시 펼친다. 속도에 맞춰 읽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터널 입구에 닿으면 빛의 성격이 바뀐다. 바깥 네온이 사라지고, 노란 조명의 점선이 차창 위로 규칙을 만든다. 나는 그 점선 사이에 문장을 끼워 넣듯 읽는다. 점, 점, 점—한 줄.

터널은 목소리를 낮춰 준다. 라디오 진행자의 말도, 엔진 소리도, 내 마음의 무게도. 낮아진 곳에 문장은 쉽게 앉는다. 터널 끝에서 하얀 빛이 한꺼번에 덮쳐 들어올 때, 방금 읽은 한 줄이 잠깐 더 선명해진다. 밝음은 언제나 종결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는 시작 쪽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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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기후정의 활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세상 곳곳에 아프고 힘들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들려줄 사랑 이야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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