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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동네서점의 계단참

고르지 않고 머무는 법

by 김하종

문을 밀고 들어서면 종이 냄새가 먼저 인사를 한다. 비닐 커버와 잉크, 종이 섬유가 섞인 냄새. 서점은 언제나 ‘고르라’고 말하는 곳이지만, 나는 오늘 고르지 않기로 했다. 대신 머무르기로 한다. 계단참—오르지도 내리지도 않는 작은 평지. 그곳이 오늘 나의 자리다.


서가를 지나며 책등의 높낮이를 훑는다. 굵은 책, 얇은 책, 낯선 출판사의 로고, 익숙한 장르 표기. 추천 엽서에는 짧은 문장들이 바람처럼 꽂혀 있다. “한 문장만으로도 오래.” “낭독하고 싶어지는 페이지.” ‘사야 한다’는 마음이 ‘살펴본다’는 마음으로 조금씩 옮겨 간다. 살피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대신 시간이 든다. 서점에서 나는 시간을 조금씩 쓴다.


계단으로 향한다. 유리 난간 너머로 층층의 표지들이 흐린 색면처럼 겹친다. 바람이 거의 없는 실내에서 에스컬레이터만 작은 바람을 만든다. 그 바람이 페이지를 아주 얇게 들어 올리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계단참에 앉아 무릎 위에 책을 올린다. 고르지 않고 머무는 첫 동작이다. 오늘은 이곳에서 한 장만 읽을 생각이다. 한 장이면 충분하다. 충분하다는 말은 늘 부족해 보이지만, 읽는 동안에는 종종 가장 넉넉한 말이 된다.



첫 문장을 소리 없이 따라 읽는다. 서점의 소리는 작게 쪼개진다. 계산대의 바코드 소리 ‘삑’, 멀리서 한 번 들리는 어린아이의 웃음, 책장을 넘기는 건조한 마찰음, 에스컬레이터의 일정한 금속 숨. 그 사이로 문장이 들어왔다가 내 호흡 위에 얹혀 되돌아간다. 나는 문장에 기댄다기보다 계단참의 수평에 기댄다. 오르지도 내리지 않는 평평함이 문장의 경사를 낮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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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기후정의 활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세상 곳곳에 아프고 힘들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들려줄 사랑 이야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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