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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준 May 02. 2022

생일에 우울한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몇 번의 우울한 생일이 지나고, N번째 생일은 꼭 행복할테니까.


28번째 생일이었다. 잔뜩 늘어난 초 개수만큼이나 행복한 생일이었다. 소중한 친구들에게 넘치는 축하를 받았고, 갖고 싶은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선물을 받았다. 사랑하는 애인과 맛있는 걸 먹고, 많은 대화를 나누고,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물론 생일이라고 매번 행복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생일이라서, 그 어떤 날보다 더 우울했던 적도 있었다. 침대 밑에 쭈그려 앉아 서럽게 울던 22번째 생일날이 그랬다. 1년 넘게 사귀고 동거까지 했던 남자친구는 내 생일을 아주 까맣게 잊고 잠만 퍼질러 잤다.


그는 내 친구 모두를 싫어했고, 나는 사랑하는 그를 위해 친구관계를 소홀히 했다. 덕분에 나는 생일날 친구들에게 그 어떤 축하 메시지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 가장 친한 친구가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와줘서, 늦은 저녁에서야 케익을 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남자친구는 결국 나를 위한 조각 케익 한 조각도 준비해주지 않았다. 조촐한 저녁 식사 한 끼조차도 나를 위해 알아봐 주지 않았다. '홈플러스 푸드코트'에서 저녁을 먹자는 그의 말에 울고불고 헤어지니마니 했다가, '무한리필 삼겹살'을 먹으며 화해한 기억만 어렴풋이 난다.


그와 헤어지니 다행히 친구관계는 회복이 되었다. 그럼에도 기억하기론 24번째 생일날도, 친한 친구들과 함께 축하를 받으며 보내지는 못했다. 하필 친구들 각자에게 큰일이 생겨서, 내 생일을 챙겨줄 수 있는 상황이 못됐다.


결국 그렇게까지는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과의 약속이라도 잡아, 누군가와 꼭 함께 생일을 보냈다. 별로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생일을 혼자 보내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생일날 우울을 겪는다고 한다. 외국에는 'Birthday Blues(생일날의 우울)'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라고 한다. 실제로 일본의 통계 결과에 따르면, 생일날에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생일이 아닌 날보다 1.5배나 많다고 한다. 1년에 한 번뿐인 날, 누구에게도 축하받지 못한다는 건, 이처럼 우울하고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꽤 슬픈 일이 된다.


나도 우울한 생일을 겪어봤기에, 친구들의 생일은 달력에 입력해두고 잊지 않고 챙기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에는 친한 친구들의 생일을 며칠이 지나고서야 깨닫고 챙겼던 적이 있다. 유독 힘들고 바빴던 한 해였고, 그 친구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와는 무관하게 생일을 잊어버렸다.


그제야 1년에 고작 단 하루로 모든 인간관계와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시험해보려 했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수능도 아니고, 생일날 누가 내 생일을 챙겨줄지, 안 챙겨줄지,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이었는데. 바쁘면 생일을 잊을 수도 있는 거고, 생일을 축하받고 싶으면 그냥 축하해달라고 말하면 되는 거였는데.


다행히 늘어난 초 개수만큼은 아니더라도, 나이가 들면서 조금의 여유로움이 더 생겨났다. 올해는 '내 생일은 내가 가장 축하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 2박 3일 구례 여행을 계획했고, 초여름의 구례를 만끽하고 왔다.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집에 케이크를 미리 주문 예약해뒀고, 생일날 초를 불고 소원을 빌고는 맛있는 케이크를 먹었다.


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나니 보였다.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고, 그들에게도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고작 생일 하루로는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늘 12시 땡 하면 축하 카톡을 보내주는 친구의 마음에 찡하고, 12시 땡 하고 축하 카톡을 보내기엔 너무 늙어버렸다며, 슬그머니 오전에 축하 카톡을 보내오는 친구의 마음에 웃음이 난다.


침대 밑에서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던 22살의 나는, 침대 위에서 감사함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28살의 내가 되었다. 제일 먼저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다며, 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축하의 말을 전해오는 그의 마음이 아리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내 곁으로 와줘서 고마워."

"네가 있어서 하루하루가 행복해."


22살, 24살의 나는 28번째 생일이 이렇게 행복할 줄 전혀 몰랐다. 아마 100살까지 산다고 치면, 100번째 생일까지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중 몇 번의 생일은 또 조금 우울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 그때가 온다면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영원히 내 곁에 소중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언젠가는 서로를 소중하게 아끼는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는 생일도 온다고. 세상에 태어나줘서 마음이 벅찰 정도로 고마운,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과 생일밤을 꼬박 새우게 되는, 그런 생일도 너의 인생에 꼭 온다고.


202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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