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많이 불어서..
23. 부산 영도 동삼동, 유림아파트, 오후. (23세)
문 앞에 서 있는 준석. 벨을 누른다. 그때 문이 열리며 고3 담임선생님었던 양숙쌤이 준석을 맞이해 준다. 준석은 부엌 식탁의자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다.
양숙쌤 : 그래. 얘기해봐라. 무슨 대단한 얘기를 할라고 집까지 온다고 했는지 들어보자.
준석 : 제가요.
양숙쌤 : 폼 잡지 말고 빨리 얘기해라 젊은 친구야~ 뭔데? 사고 쳤나?
준석 : (웃으며) 아뇨.
양숙쌤 : 그라면 뭔데?
준석 : 수능을 다시 한번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순간 정적. 말없이 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양숙쌤.
양숙쌤 : 이유는?
준석 : 연극영화과를 가볼려고요.
양숙쌤 : 연극영화과?
준석 : 네.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는 양숙쌤.
양숙쌤 : 도대체 무엇이 우리 준석이를 또 이래 흔들어 놨노.
준석 : 곰곰이 뭘 하고 싶은지 몇 달을 고민했는데.
양숙쌤 : 배우 해야 되겠드나?
준석 : 예.
양숙쌤 : 아이고 두야..
준석 : 할 수 있습니다.
양숙쌤 : 할 수 있지. 할 수 있기는 다 할 수 있지. 느그 선배들도 다 그 말하고 지금 몇 년째 의사 도전하고 고시 공부하고 아직까지도 공부하는 아가들이 태반이다. 준슥아!
말이 없는 준석.
양숙쌤 : 쌤이 한 번만 더 물어보께. 해야 되겠나?
준석 : 예.
양숙쌤 : 그라면 내일 학교로 다시 온나.
준석 : 학교요?
양숙쌤 : 책 다 버렸을 꺼 아이가? 낼 점심 지나서 학교로 오거라. 쌤이 고3 교재들 챙겨 줄 테니까.
감사함에 살짝 웃어 보이는 준석.
양숙쌤 : 되든 안 되든 하고 싶으면 해 봐야 안 되겠나 준석아. 맞제? 서류접수나 이런 거는 쌤이 해줄 테니까 우리 화상은 시험 치는 거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됐나?
준석 : 네!
24. 부산 영도 동삼동, pc방(전투감각), 오후.
PC방 문이 열리고 준석, 동글이, 종걸이가 걸어 나온다. 준석은 계단을 내려오며 말한다.
준석 : 4판 연속 지니까 화도 안 나는 게 아니라 존나 열받네. 마 똥그란 놈. 니는 스타 하지 마라.
동글이 : 니나 하지 마라. 원래 헬프 치면 바로바로 오는 기다. 쳐 늦게 오니까지지.
종걸이 : 동글아. 진지하게 얘기하께. 딴 거 해라.
티격태격하며 건물 밖으로 나오는 셋. 종걸이의 말에 동글이가 바로 받아친다.
동글이 : 마. 다시 드가자. 1:1 붙자.
준석 : 가자~. 피곤하다. 내일 또 일가야 된다.
종걸이 : 인자 얼마 안 남았다 아이가?
준석 : 하.. 힘들었다. 인간승리다. 한 달 반 남았네.
종걸이 : 아니 니 일하는 거 말고. 실기시험 친다 안 했나?
준석 : 아 실기. 그렇지. 얼마 안 남았지. 다다음주? 아마 그럴 끼야.
동글이 : 아마? 떨어지겠네.
준석 : (정색하며) 닥치라 쫌. 치기 전부터 김새는 소리고 스타도 못하는기.
동글이 : 끝나면 맛있는 거 한방 쏴야지.
준석 : 니 배를 봐라.
동글이 : 닥치라.
서로 엉덩이 차려고 티격태격하는 둘.
동글이 : 집에 가서 배틀넷 들어온나. 햄 손 다 풀릿다. 제대로 해주께.
준석 : 난 쉴란다.
종걸이 : 나도 쉴란다.
동글이 : 쉬라~ 배신자들.
준석 : 연습 마이~ 해라. 헬프 좀 고만 치고. 드가라이~.
준석은 정류장이 있는 아랫길로 내려간다. 대사 연습을 해보는 준석.
준석 : 움직이지 마! 이 10새끼.. 욕을 하는 건 좀 아이제?
25. 중앙대 실기시험장, 오후. (24세)
조교가 나눠준 종이에 적힌 단어들을 보는 준석.
조교 나눠준 종이에서 단어 세 개 선택하고 스토리 만들어서 짧게 연기하시면 돼요.
준석의 눈에 ‘하얀 소복, 간장, 졸라맨’이 들어온다.
cut to.
현장에서 나눠준 단어들로 조합한 즉흥연기를 하는 준석. 찬장에서 간장을 찾아 꺼내 귀신에게 뿌리는 시늉을 한다.
준석 : 오지 마! 오지 마!!
누가 봐도 어색해 보인다.
cut to.
박하사탕의 한 장면을 연기하는 준석. 힘차게 손가락 총을 만들어 앞을 향해 첫 대사를 한다.
준석 : 움직이지 마! 이 10새끼야!!
앉아 있는 6명의 교수님들 얼굴 표정 좋지 않다. 준석의 연기가 끝나자 무표정한 얼굴로 준석에게 질문하는 교수님.
교수님 : 김준석 학생?
준석 : 네?
교수님 : 연기한 지 얼마나 됐어요?
연기를 해본 적이 없는 준석은 당황함에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준석 : (머뭇거리며) 보름 정도.. 했습니다.
교수님 : 네. 나가보세요.
민망함에 빠르게 인사하고 나가는 준석.
26. 준석의 집, 거실, 낮.
부엌 중간에 제사 때 쓰는 큰 상이 펼쳐져 있다. 그 위엔 한솥 가득 담겨 있는 삼계탕 두 마리, 잘 익은 열무김치 등이 푸짐하게 놓여있다. 잘 익은 삼계탕은 엄마 손에 찢겨 네 가족 앞접시에 놓인다. 맛있게 먹는 가족들. 무릎과 팔꿈치가 꽤나 늘어난 살구색 내복을 아래위로 입은 준석은 식사를 마무리하고 엄마를 부른다.
준석 : 엄마.
엄마 : 왜?
준석 : 인자 내 적금 슬슬 깨야 될 거 같은데.
적잖이 놀라는 엄마.
엄마 : 적금?
준석 : 어, 공장도 한 달 정도 남았으니까 뭐 미리 깨놓으까 싶네.
엄마 : 계속 넣어놓지 왜.
준석 : 인자 서울 가야지.
엄마 : 서울? 진짜 갈라고?
준석 : 내 하고 싶은 거 해야지. 방도 구하고.
누나는 닭 목뼈를 바르면서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 : 근데 그 적금이 2년 뒤에 깰 수가 있을 텐데..
준석 : 2년? 왜?
엄마 : 엄마가 알기로 그게 상품이 그런 상품이라 그때 깰 수가 있는 거 같더라고?
준석 : 나는 지금 필요한데. 2년 뒤까지 우째 기다리노. 지금 깨야지.
엄마 : 근데 가입을 했던 상품 자체가 그런 거라 지금 못 깰 텐데?
준석 : 아니 내가 명의자잖아. 내가 깨면 깨는 거지 그런 게 어딧노.
순간 답을 못하는 엄마.
엄마 : 아이 참말로. 아마 그럴 껀데? 지금은 안되고.
그때 옆에서 열무김치로 입가심 중이던 누나가 끼어든다.
누나 : 어이, 김.
준석 : 와?
누나 : 그거 엄마가 다 썼는데?
누나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준석은 다시 되묻는다.
준석 : 뭘 다 써.
누나 : 돈 다 썼다고.
준석 : 뭐를 다 써. 무슨 말하고 있노.
누나 : 무슨 말하기는. 니 바보 아이가? 엄마가 통장도 보여줏다매? 보고도 몰랐나?
미간에 인상을 쓰며 톤이 조금 높아지는 준석.
준석 : 그래! 내가 통장 봤지! 엄마가 통장에 입금하고 적금으로 다시 빠져나가고. 엄마가 보여 주가 다 봤는데 뭐를 이상한 소리를 하노?
누나 :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래 빙시야. 그게 엄마가 니 보여줄라고 일부러 입금 한번 시켰다가 다시 뽑은 거다.
준석 : ..?
누나 : 통장 내역에 찍히게 할라고 그렇게 엄마가 한 거라니까. 우째 보고도 그걸 모르노.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들은 준석은 엄마를 쳐다본다.
준석 : 엄마.
엄마 : (놀라며) 어?
준석 : 무슨 말이고? 누나가 이거 무슨 말인데.
엄마는 원망의 눈빛으로 누나를 쳐다보다가 얘길 이어간다.
엄마 : ..준석아.
준석 : (화가 섞인) 어.
엄마 : 엄마가 집에 돈이 없어서 준석이 니가 50만원씩 줬을 때마다 누나 말대로 생활비로 썼다.
준석 : ..돈을 다 썼다고?
엄마 : ...
준석 : 아니, 그러면 돈이 없나? 내가 준 돈을 다 썼다고?
엄마 : 집에 생활비가 없어서 니가 50만 원씩 줬을 때마다 엄마가 썼다. 준석아.
준석 : (순간 울컥) 아니, 잠깐만.
엄마를 쳐다보던 준석은 슬쩍 아빠와 누나를 쳐다본다. 아빠는 앞접시를 보고 있고 누나는 무표정으로 상황을 보고 있다.
준석 : 돈을.. 다달이 50만 원씩 드린 거를.. (억누르며) 그라면 내 서울 올라가서 방 구할 때 쓰게 500만 원이라도 도.
엄마 : 500만 원 없다 준석아.
준석 : 그럼 300만 원이라도 도.
엄마 : 300만 원도 없고 100만 원도 없고 니 줄 돈 10만 원도 없다 준석아.
어이없는 준석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엄마는 그런 준석을 잠시 바라보다가
엄마 : 집에 돈이 없는 걸 우짜겠노.. 준석아.. 나중에 엄마가 다..
더 이상 아무런 변명도 듣기 싫은 준석은 보란 듯 짧은 한숨을 내쉬며 빠르지 않은 동작으로 일어나 자신의 방 여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신경질적으로 닫으며 들어간다. 준석은 눈앞에 보이는 CRT 모니터와 창문을 보며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준석 na) : 안된다.. 내 돈 주고 사야 된다..
컴퓨터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준석.
준석 na) : 이놈에 집구석은 와 맨날 돈이 없노.. 돈 벌려고 방위산업체를 가서 돈을 모았는데도 돈이 없고.. 와이래 가난하지.. 언제까지 산동네에서 살아야 되노...가난의 판을 바까뿌야 되는데... 판을 엎어뿌야 되는데...
판?
순간 준석은 부엌에 있는 제사상이 생각난다. 여닫이문을 빛의 속도로 열고 나온 준석은 상판을 잡아 천장으로 냅다 던져버린다. 그 순간 천장으로 닭뼈와 닭 국물, 나풀대는 열무김치와 김치국물 등이 샘솟듯 튀어 올랐다가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다. 준석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누나의 눈에는 아래위로 다 늘어난 살구색 내복을 입은 동생의 몸부림이 어설프기 짝이 없어 보인다. 방에 들어온 준석은 씩씩대며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호흡이 가라앉을 때쯤 너무도 조용한 바깥공기에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준석 na) : 와이래 조용하노.. 누가 상에 맞았나?..
준석은 조용히 문 근처로 다가간다. 그때 작게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
엄마 : 선희 아빠, 화내지 마요.. 쉿.. 준석이가 상 엎었으니까.. 퉁 칩시다.
준석 na) : 퉁 칩시다..?
기가 찬 듯 쓴웃음을 짓는 준석.
준석 : (작게) ..퉁
바로 그때 문 밖으로 천리교 아저씨 목소리가 들린다.
천리교 : 선희 엄마 있어요?~~ 계십니까?~
준석 na) : 아.. 천리교 아저씨..?
준석 na) : 하필 지금 오십니까..
천리교 : 선희 엄마 안에 있습니까?
점점 가까워지는 아저씨의 목소리. 당황한 엄마는 허겁지겁 부엌 바닥을 치운다.
엄마 : 네네~ 아저씨. 들어오셔요.
준석은 차마 나가지는 못하고 방 안에서 간절히 속삭인다.
준석 na) : 아저씨 문 열지 마세요.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천리교 : 선희 엄마 있습...
문을 열고 들어오며 부엌을 본 천리교 아저씨는 순간 멈춘다.
천리교 : 아?!..
짧은 정적.
그때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엄마 : 들어오셔요. 들어오셔요. 바람이 많이 불어서..
천리교 : (어리둥절) 바람이..
엄마 : 예예. 바람이 많이 불어서 상이 참말로..
준석 : (허탈하게) 바람..
잠시 조용하던 천리교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리교 : (이해하려는 듯) 아..
천리교 : 저도 안 있습니까.. 여기 오르막길 올라오는데예. 오늘따라 바람이 상당히 많이 불드라고예.
하며 바닥을 함께 치운다.
엄마 : (계속 치우며) 예예. 아 그랬어요?
천리교 : 예예. 이기 오늘따라 바람이 와이래 많이 부꼬?
방 창문을 쳐다보는 준석. 바람은 불지 않는다.
27. 며칠 후 준석의 집, 준석의 방, 오후.
준석은 자신의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다.
준석 : 와.. 멋있네.. 레드 카펫 딱 밟고.. 누구고? 차승원?
침대에 벌러덩 눕는 준석. 노래를 흥얼거린다.
준석 : 바람 불어와 내 돈이 날려도~ 당신 곁에선 외로운 내 마음~ 모든 것이 다~ 지나가 버려도~
그때 걸려오는 전화. 고등학교 동창 광민이다.
광민 : 어 준석아~ 아까는 일한다고 못 받았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나?
준석 : 어~ 잘 지내지. 애들이 니 요새 서울에 있다 카든데. 맞나?
광민 : 어. 광고 회사에 보조로 일한 지 몇 달 됐다.
준석 : 광고 회사?
광민 : 어. 왜 관심 있나?
준석 : 관심 있는 건 아닌데 나도 서울 갈라고 생각했었거든.
광민 : 아 진짜? 그라면 숙소에 같이 살던 회사 동생 군대 가서 한 명 뽑을 껀데 니 생각 있나?
준석 : (잽싸게 일어나 앉으며) 진짜가? 몰라도 일할 수 있나? 잠은 우째자노?
광민 : 잠은 숙소에 팀장님이랑 내랑 지금은 둘이 있는데 니 오면 셋이서 사는 기지. 일은 몰라도 된다. 오면 다 배운다 걱정 마라.
준석 : 맞나? 그라면 일은 언제부터 할 수 있는데?
광민 : 뭐 니만 되면 일은 바로 할 수 있다.
준석 : 진짜가?
바람 부는 창문을 쳐다보는 준석.
28. 부경대 용당캠퍼스, 학과 사무실, 오후.
준석은 종이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다. 종이를 직원에게 내미는 준석.
준석 : 이거 내면 바로 자퇴 처리되는 거예요?
직원은 종이를 받으며
직원 : 네.
인사를 하고 나오는 준석. 홀가분해 보인다.
29. 부경대 용당캠퍼스, 내리막길, 오후.
용당캠퍼스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준석. 선진종합 사무실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방위산업체 사무실 양주임 누나 전화다.
준석 : 네. 여보세요?
양주임 : 네. 김기사님. 양주임이에요.
준석 : 아 네. 안녕하세요.
양주임 : 이번에 특례 기간 끝나시잖아요. 퇴직금은 급여통장으로 보내드리면 되죠?
준석은 생각지도 못한 퇴직금 얘기에 놀란다.
준석 : 퇴직금요?
양주임 : 네, 따로 얘기 못 들으셨어요?
준석 : 아, 들었던 거 같은데.. 네네 들었습니다.
양주임 : 한 250만 원 정도 될 꺼예요. 그러면 김기사님 급여통장으로 넣어 드릴께요. 2년간 수고 많으셨어요.
준석 : 네. 주임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준석은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폴짝 뛰며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