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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Jan 04. 2023

[2022] 랑과 나의 사막_천선란

K픽션 아카이브 - 중편소설 | 이요마

랑과 나의 사막 / 천선란 / 2022

*도서 리뷰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황폐화된 세상에 무해한 생존자들, 그리고 믿음 | 이요마


언젠간 읽어야지 읽어야지 맘만 먹고 미루던 작가 중 하나가 천선란 작가다. <나인>을 쟁여두고 이 책을 먼저 선택한 까닭은 아무래도 분량 때문이었다. 작가에 대한 데이터 없이 처음 만나는 책은 중요하다. 작품에 담긴 마음이 어떤 것일지, 그가 그리는 세계가 어떤 것일지 상상하며 빌드업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 권만 딱 읽었을 때 남은 키워드는 '믿음'. <나인>, <천 개의 파랑> 등 이전에 쓴 작품들을 읽어나가다보면 또 바뀌겠지만 첫인상은 그랬다.



이야기는 49세기, 인간의 문명은 전쟁으로 모두 사라지고 오직 사막과 바다만 남은 황량한 세계에서 시작된다. 화자는 로봇으로 2844년, 전쟁시대에 만들어졌지만 얼마 안 가 땅에 묻혔고 49세기의 생존인류 '조'와 '랑'에 의해 구조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에 '고고'를 고쳐준 랑도, 그의 부모인 조도 죽음을 맞이한다. '랑'을 묻어준 후 그는 남겨진 인간 '지카'를 따르지 않고 제3의 선택, '과거로 가는 땅'을 찾아 홀로 모험을 떠난다.


'마음은 중요해.'
랑의 말에 나는 마음이 없다고 대답했고, 랑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목적이야. 네 목적에 가장 빨리 닿으려고 애쓰는 게 마음이야.'



소설은 참 잔잔하다. 때론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고요하다. 당연하다. 모든 게 다 망해버린 세상, 인간형 로봇 하나가 혼자 사막을 걸어가는 얘기가 박진감 있다면 그것도 이상할 테다. 그 잔잔함 속에서 '고고'는 그저 과거로 가는 땅을 찾아 선선히 걸어갈 뿐이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인간이든 로봇도 차분하다. 그리고 무해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으쌰으쌰 연대하지는 않지만, 서로에게 해가 되지는 않는다. 외려 가진 걸 나눴으면 나눴지 적대시 하지 않는다. 


그런 완전히 진이 빠져버린 세상. 생명의 에너지라곤 보이지 않는 호흡기 떼기 전의 지구의 풍경 속에서 로봇 '고고'의 사색은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인간의 마음은, 감정은 무엇인가. 되뇌이는 질문들 속에서 고고는 종국에 폭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랑과의 행복했던 과거가 있는 곳으로 자신을 움직인다. 막판에 살리라는 인물은 조금 뜬금없는 NPC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를 이야기로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독자는 배터리가 다 방전될 때까지 영원히 사막을 거니는 무해한 로봇의 지난한 여정을 따라가야했을테니 말이다. 




인간의 마음,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로봇이라는 타자의 시선에서 그리다보면 '이해불능'의 순간에서 오는 아이러니가 주는 재미가 있기 마련이다. <랑과 나의 사막>은 그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랑'의 영향을 많이 받고, 학습해서였을까 고고는 반려인의 죽음을 경험한 동물 내지 인간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람되지만 기시감과 불쾌함의 골짜기 사이의 어드메를 상상하며 읽었다. 선문답 속에서 가치를 찾는 건 중요하다지만, 사막을 내내 걷는 걸 따라가는 간접 경험은 그렇게 재밌는 과정은 아니었다.


다만, 작가에게 느낄 수 있었던 건 어떤 '믿음'이었다. 서로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서로를 해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믿음. 아주 작은 유대감이 만드는 따뜻함이 내내 느껴진다는 점은 좋았다. 냉랭하고 각자도생한 현재의 결말은 작가가 그리는 49세기의 황폐한 세상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었을지언정,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과 내가 지키고 싶은 마음을 유지하고 끝까지 나아가는 의지가 마지막장을 덮고 나서도 여운처럼 남더라.


나는 무엇을 믿고 싶을까. 무엇을 간직하고 싶을까. 그리고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든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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