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요마 Oct 03. 2023

7. 영감 모먼트

좋아하는 것이 마땅히 없어서요

unsplash.com

7. 영감 모먼트

청소년 소설이란 무엇일까. 무얼 써야 그들에게 의미있는 이야기가 될까. 고민의 시작은 원론적이었다. 전날 밤 레퍼런스랍시고 본 영화 <헝거 게임>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 복잡했다. 故박지리 작가의 <다윈 영의 악의 기원>느낌이 나는 계급화된 구역들, 그 안에서 목숨을 걸고 생존게임을 벌이는 아이들, 시스템과 시스템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 시스템을 관리하는 사람들과 판을 깨려는 사람들. 일찍 자려했는데 이야기가 워낙 재미있어서 빨려들어가듯 시리즈를 2편까지 보았다.


'와 쩐다! 나도 이런거 써보고 싶어!' 하는 긍정효과를 기대했지만, 외려 남은 건 부담감이었다. 백지 앞에서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건 '나도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는걸까? 그게 되나?' 하는 자기의심이었다. 창밖의 해변을 내려다보았다. 바닷물은 때론 빠르고 높게, 때론 느릿하게 모래톱 위로 물을 흘려보내고 거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분량을 늘려서 써야지 마음먹은 원고. 가제 <다이빙 엘>을 훑어보다가 문득 전화로 내가 쓰던 이야기 내용을 고등학교 동창 녀석에게 들려줬던 기억이 났다. 한 5분 정도 줄거리를 듣던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아는 걸 써봐. 배경을 한국으로 해도 괜찮지 않겠냐?"

왜 그 기억이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불현듯 떠오른 녀석의 한 마디가 백지공포증을 뚫어내는 돌파구가 되었다. 나는 왜 막연하게 외국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을까. 그건 아마도 막연하게 나마 <해리 포터>나 <헝거 게임> 같은 대형 IP 혹은 그 때 한참 보던 넷플릭스 드라마 <다크>나 애니메이션 <슈타인즈 게이트>처럼 뭔가 스케일 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마음에서 였던 것 같다.


이렇다할 완결작이 별로 없는 초심자가 첫작부터 대박 작품을 내기는 힘들다. 타이핑을 하기 전까지는 어쩐지 잘 될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으로 고양되지만, 막상 쓰기시작하면 상상과 현실의 갭이 상당히 크게 느껴진다. 어쩌면 나는 잘 되었을 때의 나만을 생각하면서 이야기의 스케일도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키운 게 아니었는가 싶더라.


공모전 요강에 맞춰 연령은 청소년, 친구의 조언을 따라 국적은 한국으로 한정하니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길이 보였다. 고등학생인데, 운전을 할 수 있는 나이이고(고3), 번아웃을 맞은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주인공이면 재밌겠는데? 싶더라. 기존의 설정들을 한국으로 끌어오면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 이러면 어떨까? 제한 없이 쓰다보니 재미가 붙어 해가 질 때까지 노트북을 두드렸다.


'미국 미스터리 유튜버 셋이 미스터리 스팟에서 백골을 발견한다'는 설정은 어느새 '한국 고등학생 미스터리 유튜버 셋이 강원도 고성의 운망 해변에서 백골을 발견한다'는 좀 더 친숙한 이야기로 구체화되어있었다.

지금의 버전은 공모전 이후로 긴 시간이 지나며 여러모로 수정되었지만, 설정과 인물 빌드업은 그 하루에 만들어졌다. 영감 모먼트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 다음 내용을 쓰고 싶어서 까페에서 나가기가 싫은 마음이 들다니 참 기이한 경험이었다. 해가 질 무렵 버스가 끊기기 전에 역으로 가야했기에 가방을 챙겨나와 묵호역을 향해 걸었다. 


한 시간 정도 붉게 물들어가는 바닷길을 따라 걸으며 '지금 이 순간'을 다시 만나기를 기도했다. 아마 반복한다면 일상처럼 점차 무뎌져 갈 것을 알지만, 매일을 오늘처럼만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계속 했다. 그러다가 문득, 매일 이렇게 살면 되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고 동해시로 돌아오는 버스에선 아예 다짐을 해버렸다.


'앞으론 이렇게 고양된 느낌을 받는 일을 하면서 살자. 매일 영감이 가득한 충만한 삶을 살자. 살고 싶은 매일을 만들자.'

뭐 된 것도 없었지만 뿌듯한 하루가 마무리 되고 있었다.

(계속)





+ 덧)

그때 쓰던 소설 <가디언즈 프로젝트>가 계약이 불발되어 다시 밀리로드에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확인 가능하니, 궁금하시면 한 번 보러 와주세요!

https://millie.page.link/E5Nis 

매거진의 이전글 6. '어쩔 수 없이', 되풀이는 없을 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