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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Oct 04. 2023

8. 나흘 그리고 한 달

좋아하는 것이 마땅히 없어서요

8. 나흘 그리고 한 달

처음엔 '잃어버린 내 재미를 찾아 떠나는 어드벤-쳐'라는 부제를 달고 시작한 본격 우울증 극복 에세이였지만, 어째 쓰다보니 면구스럽게도 글이 바다로 가고 있다. 이 시간들도 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기에 주제와 연장선상에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글을 이어갈 생각이다. (뻔-뻔)


동해의 마지막 날은 서울역으로 돌아가는 KTX 시간에 맞추느라 무얼 더 쓰거나, 보러가거나 하진 못했다. 다만 노포로 유명한 중국집 덕취원에 가서 삼선짬뽕 하나 먹고 역으로 넘어와 열차에 몸을 맡겼다. 문득 참 별 거 안 한 3박 4일이었구나 싶었다. 첫날 영화관에 갔다가 둘째날, 셋째날은 하루종일 카페에서 책을 보거나 글 썼고, 마지막날 짬뽕 먹고 돌아오는 일정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전의 어떤 여행보다도 충만한 여행이기도 했다. 영감 모먼트의 가호 아래 4시간이고 5시간이고 '쓰고 싶은 것'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 시간이 주는 행복감을 매일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으니 말이다.


여행은 끝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씻고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지?'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내 처지는 퇴사하고 하고 싶은 것도, 해야할 일도, 이렇다할 계획도 없는 백수에서 여행을 다녀왔다는 점만 추가된, 달라질 것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문득 공연한 걱정으로 어떡하지. 어쩌지. 하는 걸보니 내가 그저 살고 싶어서 잠만 자던 시절로부터 한 발을 빠져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고민을 했다. 과장을 보태 인생의 1/3은 고민으로 보낸 것 같다. 문제는 그 시간들이 내게 해답을 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고민의 말로는 늘 '하 모르겠다. 나중에 생각해.'였고, 그렇게 이월하고, 또 이월한 문제들은 내 마음 속 한 편에 늘 산적해있었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이번 만은 그러지 말자는 마음이 들었다. '살던대로' 고민하지 말고 생각을 하지 말든지 문제를 해결하든지 하면서 달리 행동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왠지 그렇게 살아도 별 일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다짐을 하고 제일 먼저 한 것은 황당하게도 '스톱워치'를 사는 일이었다. 언젠가 장강명 작가가 전업을 하기 위해서 업무 시간을 스톱워치로 체크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작가의 삶이니, 현업에 있는 사람이 하는 방식을 카피하자는 생각에서였다. 다음으로는 김이설 작가의 방법을 결합했다.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라는 글쓰기에 관한 에세이 앤솔로지에서 발견한 그의 루틴으로, 매일 작업 일지를 인스타에 올리는 일이 그것이었다. 하루하루의 작업일지와 스톱워치 누적 시간을 체크해서 인스타에 기록을 하자. 고민할 시간에 1분이라도 더 채우고, 한 장이라도 더 인증하자. 그러면 뭐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다음날부터 한 달여의 시간동안 나는 매일 스톱워치를 들고 동네 카페로 나섰다. 책을 읽거나 동해에서 구상했던 소설 <가디언즈 프로젝트>를 쓰거나 하면서 시간과 작업을 정량화했다. 처음엔 잊어버려서 체크를 못하거나, 스톱워치를 집에 놓고 오는 일도 있었지만 점차 손에 익었고 나중엔 기록을 올리기 위해(?) 가기 싫은 마음을 꾹 누르고 나가는 날도 생겼다. 본의 아니게 루틴이라는 게 생긴 셈이다.


동해에서의 나흘 같은 한 달을 보냈다. 영감 모먼트의 요정이 매일 나를 찾아오진 않았지만 사나흘에 한 번 씩은 기적의 몰입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순간적인 도파민 분비 타임을 다시 경험해보고자 노트북을 챙겨서 어떻게든 하루 3~4시간은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다 왔다. 물론 시간만 때우다 온 건 아니었다.


여차여차 2월 말에 마감이던 청소년 소설 공모전의 미완성원고 투고 조건을 충족할 수 있었고, 이왕 스톱워치 재면서 생산적인 생활을 하는 거 매일 일정한 시간(오후 8시)에 밖에 나가볼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한 걷기도 습관으로 자리잡았다. 충만하고, 또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애석하게도 평안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위기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쌓이고 있었고, 새로운 루틴이 익숙해져 새로움이 무뎌질 무렵 뻥-하고 터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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