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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Dec 06. 2023

[세계문학] 피해자의 서사가 읽기 어려운 까닭은…

임레 케르테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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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에게 죽어간 여백사의 가족으로부터


원래 계획은 <삼국지>를 리뷰할 생각이었다. 마음이 쪼그라들어 자신을 책망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요즘이었기에, 내 안의 호방함(?)을 깨워볼 요량으로 황석영 번역판으로 <삼국지>를 읽기 시작했더랬다. 재밌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만화로 두세 번, 소설로도 두어 번 읽고, 게임으로는 수십 번 플레이했던 지라 대강은 다 아는 이야기임에도 재밌었다. 그래 이 맛에 삼국지를 읽지! 하며 반동탁연합 파트를 읽어나가다 한 에피소드가 나를 붙잡았다. 

동탁 암살에 실패한 조조가 진궁과 함께 여백사의 집에 몸을 숨긴 에피소드였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태였던 조조는 그 집의 식솔들이 칼을 갈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집에 있는 모든 이를 죽여버린다. 그러나 알고보니 그들은 조조와 진궁에게 대접할 돼지를 잡기 위해서 칼을 갈고 있었던 것. 일을 벌어졌고, 집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달아나던 두 사람은 아뿔싸, 여백사를 만나게 된다. 밥 먹고 가라는 그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던 조조는 돌연 여백사 마저 칼로 베어버린다. 가족 모두가 죽어있는 집에 가면 자신에게 앙심을 품을 게 아니냐는 게 그 이유였다. 이 다음에 그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진궁이 말한다.
"그렇지만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말 옳지 않은 처사요."
"차라리 내가 천하 사람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이 나를 저버리게 할 수는 없소."
조조의 차가운 대답에 진궁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삼국지 1》, 황석영 역 中


소시오패스 조조는 이후 수십년동안 세지도 못할만큼 많은 사람을 죽이며 위나라의 세를 키워간다. 쭉쭉 읽어나가며 삼고초려 후에 오나라로 제갈량이 파견간 장면까지 이르렀을 때 <삼국지>를 잠시 멈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삼국지가 재밌는 이유는 명확해서 그런게 아닐까. 제갈량과 주유는 지략배틀을 할 것이고, 제갈량은 승리하고 주유는 죽을 것이다. 돌아와서는 유장의 익주와 유표의 형주를 흡수할 것이고, 칠종칠금을 하며 남만을 정벌할 것이다. 그 다음에 적벽에서는… 이런식으로 기억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전부 승자의 역사들이었다.

승자의 역사는 명징하고 재밌다. 주인공들에게 자신을 이입하기도 좋다. 호탕하고 기세등등한 군주와 장수들의 이야기는 읽어도 읽어도 재밌는 것이다. 그러나 여백사의 이야기 같은 건 역사에 남지 않는다. 전장에 징용되어 끌려온 병사들도, 불타버린 마을에서 피란을 가는 백성들의 이야기도 남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생각을 하던 와중에 오늘 읽을 책,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를 만나게 되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혹 책을 읽으실 분들은 뒤로가기!
★책의 모든 내용을 다루지 않습니다. 일부만 발췌해서 글을 씁니다.




알라딘
같이 읽은 콘텐츠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4부작' 중 한 권으로, 아우슈비츠 절멸 수용소에서 살았던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묻어나는 책이다. 이 책은 수용소에서 살아돌아온 이후의 삶에 대해, 장황하지만 진실되게 읊조리는 작품이다. 책은 얇지만 읽는 게 쉽지 않았다. 구조를 파악하기보다는 증언에 담긴 맥락과 느낌을 따라가기 바빴다. 

---

이 책을 읽어야지! 다짐하고 잡은 건 아니였고, 우연히 도서관에 갔다가 얇은 세계문학이 있기에 리프레시를 하고 <삼국지>를 마저 읽어야지 하는 나이브한 생각에서 읽기 시작했다. 170페이지의 짧은 분량인데도 이 책을 읽는데는 거의 한 달이 걸렸다. 책을 잡는 것도 어려웠고, 읽는 내내 내가 이해를 하고 있는 게 맞나도 싶었다. 나중에는 그냥 텍스트를 받아들이자는 마음으로 조금씩 완독까지 갈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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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역사는 명징하나, 피해자의 증언은 장황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작가이자 번역가인 주인공 '나'의 진술로 가득차있다. 한 권 내내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과거의 어떤 사건들에 대해서, 기억에 대해서 반추하고 곱씹고 다시 글로 쓰고 고통받고 좌절하기를 반복한다. 그의 증언은 장황하고, 정돈되어 있지 않다. 
 

명백한 사실은, 내가 소스라치며 깨달았다는 것이다. 내가 끊임없이, 그러니까 미친 듯이 부지런히 글을 썼다는 것, 단지 글만 썼다는 것, 그리고 그건 단순히 생계 때문은 아니었다는 것을, 왜냐하면 나는 글을 쓰지 않더라도, 목숨은 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목숨은 부지한다면, 그렇다면, 무엇이 나에게 글쓰기를 강요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모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존재한다, 내가 글을 쓰지 않는다면, 누가 알겠는가, 내가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 그러니 나는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또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의 글쓰기와 나의 생존 사이에는 무엇보다 심각한 상관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명백한 사실이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
나는, 실제로 그리고 진실로, 글을 써야만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것이 나에게 허용된 유일한 해결책이었던 것 같다, 설령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 해결책이더라도, 그렇더라도 그것은 나를, 이제 와서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미해결의 상태 속에 놓아두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해결되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어야 할 미해결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미해결의 상태는 차치하고, 이 미해결 상태의 불충분함과 이 불충분함에 대한 불만족스러움이 나를 괴롭혔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보면, 나는 어쩌면 글쓰기를 하나의 도피로 여겼는지 모르겠다, 하나의 도피, 그뿐만 아니라 하나의 구원으로 여겼는지 모르겠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中


그는 미친 듯이 부지런히 글만 써왔다. 자신이 왜 쓰는지도 모른채로 그저 써야만 하니까, 쓸 수밖에 없으니까라며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그렇게 쓰고, 쓰는 행위에 대해 증언하면서 점차 내면에 있던 어떤 마음들이 구체화되어간다. 오직 글을 쓰는 동안 '존재할 수 있고', 그것이 그에게 허용된 '유일한 해결책'일지도 모르고, 더 나아가 '하나의 도피'이자 '하나의 구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확실한 건 아니다.

'나'가 자신마저 미심쩍어하며 불확실하게 말하는 계기가 있다. 바로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의 기억이다.

"아우슈비츠는 어떤 말로도 설명될 수 없다."라는 저 불운한 문장도 저 불운한 작가가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그저 침묵해야 한다는 말로 설명한 하나의 설명이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란, 그렇지 않은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ㅡ 아마도 나는 이렇게 말했었을 것인데 ㅡ 존재했다. 더 나아가, 아우슈비츠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아우슈비츠는 어떤 말로 설명될 수 있다. 그에 반해 아우슈비츠는 존재하지 않았다, 라는 해명은 있을 수 없다, 즉 아우슈비츠가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고, 실제로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실현되지 말았어야 했음에 대한 설명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아우슈비츠가 실재하지 않았다는 설명은 불가능하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中


과거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이 책에서는 그 참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몇 개의 에피소드가 나오긴 하나 편린에 가깝다. 그러나 '나'가 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지는 조금씩 설명된다. '나'가 쓰는 모든 것들은 '아우슈비츠'이자 '유대인'의 기록들이다. 그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지구상에서 타인에 의해 지워질 뻔한 존재들이 그날의 과거가 버젓히 존재했음에도 그것에 대해 말하는 걸 금기시하거나,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건 증언밖에 없다.

그들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아픔'을 직시하고 재현해야 한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건 자명하다. 그 누가 트라우마를 되새기고 싶겠는가. 자신을 덮고 있는 방어기제들과 피하고 싶은 고통들을 뚫고 가까스로 닿아서 나오는 방식은 장황하고, 듣기 힘들 수밖에 없다. 당사자에게 객관화와 정리와 증명을 요구하는 건 잘못된 방법일 게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나는 한 가지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화자인 '나'를 이해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를 '나와 다른 사람'으로 라벨링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피해 당사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있는 그대로 텍스트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딱한 사람, 불쌍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나와는 선을 그었다. <삼국지>를 읽을 때와는 다른 메커니즘이었다. 자연스럽게 조자룡이나 허저 같은 명장에 나를 투영해 전장을 누비는 상상을 하며 서사에 빠져들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가해자의 역사는 명징하기에 나를 투영하기에 좋다. 피해자의 증언은 장황하기에 나와 분리하기에 좋다. 비단 독서뿐이 아니었을 게다. 뉴스와 역사와 수많은 사실들 앞에서 나는 이렇게 받아들이며 살아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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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속에 처박히는 사람의 기분, 고개를 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나'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태어난 아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곳에서의 경험, 이를테면 배식에서 제외되었던 자신과, 추가 배식을 받았지만 다시금 받지 못한 자신을 찾아와 빵을 건네주었던 '선생님'의 이야기라거나 해방 후 우연히 화장실에서 마주한 독일인의 달라진 태도와 관련한 에피소드라든지 하는 것들부터 전체주의에 대한 추상적인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쓸 수밖에 없는, 써야만 하는'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려 간다. 그의 아내는 이렇게 반응한다.

이 이야기에서 내 아내의 마음에 가 닿은 것은, 그녀가 언급했듯, 인간이 스스로 유대인으로 살아갈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유대인에 대한, 혹은 유대인과 관련한 책을 읽을 때면 어김없이, 얼굴이 또다시 진흙 속에 처박히는 사람의 기분이 되었다고 했다. 이제야 그녀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라고, 나의 아내는 말했다. 나의 소설을 읽으며 나의 아내는 내 소설의 "주인공"이 느끼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다, 죽어 가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에 내면의 해방을 경험하는 주인공처럼. 비록 단지 덧없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이런 해방감을 체험했다고, 나의 아내가 말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中


'나'와 아내는 그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고통을 받아왔다. 존재하지만 비-존재하는 존재로 취급받아온 까닭이다. 유대인이기에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유대인이기에 일상에서도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다.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저 '라벨링'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말마따나 전체주의 안에서 가해자와 희생자는 단 한 가지를 입증하는 것에 헌신을 다한다. 바로 '허무'다. 자가당착에 의한 행위임에도 의미가 부여되며 승리의 행위가 되면 이유 같은 건 중요치 않게 된다. 유대인은 그렇게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그저 존재 이유로 차별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아내와 같이 아우슈비츠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도 내면의 수치심이 새겨진다는 것이다. 

비록 나의 아내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우슈비츠라는 표상 안에 서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대인이라는 표상 안에. 그녀가 앞에서 사용했던 말을 인용하자면, 진흙이라는 표상 안에 있었다.
(...)
그리고 아우슈비츠로부터는 치유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아우슈비츠라는 질병으로부터는 그 누구도 결코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아내가 벌써 외워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결코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며 더욱 몹쓸 것은, 그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아내는 자신이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과 그와 결부된 모든 일들을 이미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도 한 시절이 있었다고, 그때 그녀는,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바로 그것 때문에 언젠가는 매우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그런 상상을 했었다는 것이다.
(...)
후에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그녀에게 절망감과 동의어가 되었다. 천벌을 받은 기분, 소심함, 의심, 어딘가에 늘 매복하고 있는 두려움, 어머니의 질병.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는 혼자 어두운 비밀을 숨기고 있는 기분이었고, 집에 돌아가면 그곳은 유대인의 감정들과 유대인의 생각들로 들어찬 게토였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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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서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감상의 마무리를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을 잊지 말고 그들과 연대하고, 그들을 위해 노력하자고 끝난다면 나이브하지만 쉽게 정리하고 마음도 편했을 게다. 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주인공 '나'와 아내를 분리했다. 마치 그들이 겪은 일은 우연이었을 거라고, 내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모든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계급차별, 여성차별은 물론이고 위안부, 강제 징용부터 5.18 민주화운동의 지역차별, 가깝게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에서 남겨진 사람들, 전장연의 이동권 투쟁까지.  각각의 맥락이 다르고 사건의 경중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모든 일의 당사자들에게 바깥의 사람들은 라벨을 붙인다. 당사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할만큼 보상을 다했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이유도, '나와는 다른, 내가 앞으로도 경험할 일 없는' 존재들로 선을 긋기 때문일 게다.

우리가 이곳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다시금 이곳으로부터 사라져야 하는지를알지 못한다고, 나는 썼다. 나는 알지 못한다고, 나는 썼다. 왜 내가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을 삶 대신에, 나에게 우연히 할당된 이 망가진 파편들을 살아 내야만 하는 것인지를: 이 성별을, 이 육체를, 이 의식을, 이 지리적인 현장을, 이 운명을, 언어를, 역사를, 셋방살이를, 왜 내가 살아야만 하는 건지, 나는 모른다고 썼다.
(...)
아우슈비츠는 아주 오래전,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이미 수 세기 전부터 저 공중을 떠돌고 있었는지, 셀 수도 없는 파렴치한 행위들의 광선 속에서 익어 가다가, 마침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검은 열매처럼, 결국은 존재하는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이제는 불가피하다. 그것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성의 표상이자 행위다, 내가 세상을 자의적인 우연의 연속으로 간주하려 든다면, 그것은 세상에 대한, 그러니까, 매우 무가치한 관점이 될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세계를 이성적으로 보는 사람만을 세계도 이성적으로 보는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中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이었을까. '나'가 재수가 없어서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망가진 파편같은 인생을 살아야했던 걸까? 그는 "결국 존재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이 모든 일은 개개인이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인류적으로 누군가에게는 벌어질 일이라는 것이다. 결코 일회성 우연으로 벌어질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기에 히틀러가 악마니까 벌인 일, 전범이라는 악마가 벌인 일이 아니라 '언젠가는 벌어질' 진행형의 문제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건 네가 잘못 태어나서(처신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막말 속에 피해자가 살게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들의 서사를 읽고, 표상을 세계로 끌어올려야 하는 이유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게하고, 이유 없이 라벨이 붙은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그저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데 있다. 존재하는 사람을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세계로부터 복원하는 작업은 그래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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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제목이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일까?


'나'는 아기를 갖자고 말하는 아내에게 단호하게 "안 돼!"라고 외친다. 자신이 겪어온, 아내가 겪어온 경험들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반복해서 겪지 않게 만들고 싶다는 것이 이유다. 이것 때문에 아내는 '나'를 떠난다. 아내가 아우슈비츠라는 절망적인 과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손을 잡아 미궁에서, 늪에서, 진흙탕에서 끄집어내 사랑으로 몹쓸 기억을 영원히 등뒤로 버리자고 해도, 손을 뿌리치고 '나'는 다시 진창 속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마음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스즈메의 문단속>을 통해 지난 아픔의 과거를, 이제는 문을 닫고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가자고 메시지를 주듯 아내는 과거에서 '벗어나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한 발 내딛어' 미래를 도모하자는 뜻에서 '나'에게 제안한 것일 게다. 그러나 '나'는 아우슈비츠라는 과거를 영원히 털어낼 수 없다. 털어내어서도 안 될 일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부정하는 행동일 테니 말이다.

말하자면 행복에 대해 쓰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행복이란 어쩌면 너무 단순한 것이어서, 그것에 대해서라면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거라고, 나는 적었다,
(...)
삶을 글로 쓰는 일은 삶을 물음에 던지는 일임은 명백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을 물음에 던지는 것은 오직 자신의 삶을 이루는 것들로 질식되고 있거나 어쨌든 그 안에서 기형적으로 틀어지고 있는 자뿐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기쁨을 찾기 위함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나의 글쓰기로 고통을 구하고 있다, 거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그렇다, 그것은 아마도 고통이 곧 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中 


그가 아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계속해서 글을 쓰며 자신의 삶에 물음을 던지는 까닭은 오직 '진실'에 닿기 위해서다. 그것은 극복하고 치워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기억함으로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피해자, 희생자의 서사는 지난하고 괴롭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진실을 위해서라도 그 불편함을 넘어 피해자 서사를 읽고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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