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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학이 Feb 22. 2024

세 번째 겨울

눈꽃저고리 입은 한라산

 겨울에는 제주에서 무엇을 할까? 눈 쌓인 한라산을 보는 것은 제주의 여름바다에 가는 것만큼 설레는 일이다. 영하로 기온이 잘 떨어지지 않는 제주에 눈이 오면 마당으로 나가 한라산을 본다. 눈꽃 저고리에 뽀얀 털 배자로 단장한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보다 눈이 녹기 전에 저 산으로 가고 싶어 안달이 난다.


 눈이 내릴 때는 입산통제가 되기 때문에 떠날 준비를 해놓고 일단은 기다린다. 눈이 그친 후 통제가 풀리는 첫째 날이 한라산의 겨울왕국을 만끽할 수 있는 날이다. 예약이 필요한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는 못 가더라도 어리목주차장으로 가서 윗세오름이나 어승생악을 올라가도 눈을 즐기기엔 충분하다.



1월에 눈이 쌓여 이번에는 정말 눈구경을 하러 가볍게 어승생악으로. 아이들 아이젠을 급하게 주문한 후 설산을 처음으로 다 함께 올랐다. 아침 일찍 서둘렀지만 조금만 늦었으면 주차장 만차로 눈구경도 못하고 돌아갈 뻔했다. 어리목주차장에서 우회해 아래 길가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12월 27일 윗세오름을 올랐을 때도 눈을 보고 놀랐는데 어승생악을 천천히 가보니 또 새로운 느낌이었다. 나무에 쌓인 눈을 보며 앞사람이 밟고 간 발자국을 보며 천천히 걸어가니 상고대도 여유롭게 보고 전망대에 올라가기까지 하얀 눈을 실컷 보았다. 아이들도 처음 맞는 설산이 신기한 듯 잘 올라가서 다행이었다. 등산화도 없어 발가락이 얼어붙고 아이젠도 자꾸 벗겨져 말썽이었지만 정상에서 먹은 미역국밥과 함께한 이모 삼촌들과의 설산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서울에서 눈이 오면 아파트 놀이터에서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하는 게 다였다. 눈이 쌓인 것을 즐기기도 전에 경비아저씨께서 부지런히 뿌려주신 염화칼슘으로 기대했던 하얀 세상은 순식간에 녹아 아스팔트 길이 제 얼굴을 드러냈었다.


 제주 시골은 다르다. 큰 도로가 아니면 빠르게 제설작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중산간 쪽으로 올라 눈 쌓인 곳에 차를 세우고 놀면 된다. 눈을 귀찮은 존재로 여겼던 내가 4년 차 제주댁이 되니 아무도 밟지 않은 설산을 제일 먼저 가고 싶어 하는 탐험가로 변해있었다.


 세 번째 겨울을 맞으니 제주 겨울을 버텨낼 방법도 생긴 것 같다. 비 오는 날이 많고 칼바람에 해님은 가끔씩만 얼굴을 비추지만 눈이 온 날은 흐린 날씨를 잊어버리도록 아름다운 겨울왕국이 되니 추위 따위 두렵지 않다. 마지막 설산을 눈앞에 두고 마음속 깊이 간직한 채 한라산의 봄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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