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에서 북서부의 중심도시 타브리즈로 향하는 야간기차 안. 나는 2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나와 같은 객실을 쓰는 3명의 승객들은 모두 남자, 각자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을 보는데 여념이 없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인사를 나눴다. 내 아래 침대를 쓰는 사람도 이를 닦으며 나에게 내려와서 앉아도 된다며 자리를 나눠줬다. 그의 이름은 마수드. 비즈니스맨인 그는 출장 때문에 타브리즈를 지나 터키와 접한 국경도시인 마쿠로 간다고 했다. 막연히 타브리즈에 가면 터키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구체적인 계획이 없던 나는 그를 따라가기로 단숨에 결정했다.
14시간의 기차여행 끝에 타브리즈에 도착했다. 마수드라는 행운을 잡은 나는 그를 따라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타브리즈에서도 터키로 가는 직행 버스가 많았지만, 이미 자리는 꽉 차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그를 따라 마쿠로 간 다음, 걸어서 국경을 넘는 것. 마수드는 자기 표를 사면서 내 것도 같이 끊어줬다. 버스표를 사고 남는 시간 동안 밥을 먹으러 터미널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수드는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계산까지 마쳐두었다.
"괜찮아, 니가 이란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남기고 갔으면 해서야. 이란 사람들의 작은 성의 표시라고 생각해줘."
그는 내게 이란에 대해 해주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이란 사람과 마찬가지로 '신정 정치'를 고수하는 정부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자유 이란 방송'과 같은 느낌의 유튜브 채널과 인스타그램 사진들을 보여주며 나에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가 얘기해준 이란 최근 이슈에는 꽤 충격적인 사건들도 있었다. 한 소녀가 춤추는 영상을 자기 인스타그램에 올렸다가 종교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받았다고. 자신들의 순수한 이슬람 문화를 지킨다며 그것을 정부 차원에서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건 전근대적으로 보였다.
"무슬림이 되기를 택한 건 내 조상인데, 왜 나까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심지어 그 합리적 의심마저 죄가 되는 곳이야. 나도 그게 내 선택이라면 기꺼이 따르겠어. 하지만 나는 애초에 선택권을 가진 적조차 없는걸. 신을 믿는 사람이 히잡을 쓰던 춤을 안 추건 그것 또한 개인의 자유인데,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정부가 신을 강제하고 있는 꼴이야."
그를 포함한 많은 이란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의 폭이 주어지는 사회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비단 종교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도 사회적 차원에서 개인에게 강요하는 믿음이 만연해있다. 엄격한 도덕률, 내셔널리즘 등으로 잣대를 들이대 거기에서 벗어나면 언제든지 돌을 던질 준비가 된 사람들. 사실 그들이 옳다고 내세우는 그 가치들도 진정한 옳음이 뭔지에 대한 생각 끝에 얻어낸 결론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 아닐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자기도 모르게 언젠가부터 그렇게 좁고, 완고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항상 맞고, 옳은 것만 행해서 남을 평가하고, 가르치려 드는 양반은 못돼도 좋으니까 인간적인 보통 사람이 되고 싶다.
마쿠 가는 길
4시간 뒤 마쿠에서 곧장 택시로 갈아타고 국경으로 향했다. 마수드는 국경까지 나를 바래다줬다.
"나 이란 돈 다 쓰고 가야 해. 아직 리알이 좀 남았어."
택시비까지 내려는 그에게 아직 지갑에 남은 이란 돈을 쥐어주려 했지만, 그는 터키에서 터키 돈으로 바꿔 쓰라며 한사코 받지 않았다. 출국 심사대 앞까지 따라와 준 그는 계속 내가 걱정되는 듯했다.
"안전한 여행되길 바래, 굿 럭"
비록 하루가 채 되지 않은 짧은 인연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꽤 많이 아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이란-터키 국경
국경을 넘어 터키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가는 곳을 따라가 보니 돌무쉬가 기다리고 있었다. 돌무쉬는 중앙아시아의 마슈르카와 비슷한 개념의 합승 택시. 터키 돈이 아직 없어서 걱정스럽게 가격을 물었다. 도우베야짓까지는 8리라. 다행히 3년 전 여행에서 쓰고 남은 10리라짜리 지폐가 한 장 있어서 차에 오를 수 있었다. 조그만 봉고차 안은 이내 사람들로 가득 찼는데, 다들 검은 비닐봉지에 네모 각진 물건을 들고 있었다. 이 사람들 다 이란에서 기념품이라도 사 오나 궁금해졌다.
"메르하바(안녕), 다들 비닐봉지에 뭐를 가지고 다니는 거야? 한번 봐도 될까?"
"아, 이건 그냥 담배야. 이란에서는 터키보다 몇 배는 싸게 살 수 있거든. 한 사람당 세 보루까지는 면세로 국경을 통과할 수 있어서 매일 국경을 넘나들며 담배를 사 오는 사람들도 있어. 터키로 넘어와 다시 시장에 비싸게 되파는 거지."
옆자리에 앉은 턱수염을 수북하게 기른 형님이 설명을 해줬다. 그는 나를 집에 초대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도우베야짓을 뜰 계획이라 아쉽지만 정중하게 거절해야 했다.
터키 동부의 쿠르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인 쿠르디스탄에서 발생하는 최근의 정치적 불안에 대해 많이 들었지만, 나는 터키 국경을 넘으며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이스파한에서 가방을 털리고 내내 신경이 조금 곤두서 있었던 것 같다. 돌무쉬에서 내려 택시 아저씨들에게 다가가 싼 호텔을 추천받았다. 가르쳐준 대로 따라간 호텔은 딱 기대한 수준의 싸구려 여관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하룻밤만 묵을 곳이니 가격만 괜찮으면 상관없다. 칠이 벗겨진 방 안에는 나방이 한 마리 붙어있었다. 이내 도망친 나방은 자취를 감춰서 나를 더 찝찝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곳에 있는 게 백 번 낫지.
#70 외로운 산
"한국말 되게 잘하시네요. 저희도 깜짝 놀랐어요."
3년 전 여름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짐을 잃어버린 나와 친구를 도와주던 대한항공의 터키인 직원인 에멜. 분실물센터로 우리를 안내하게 된 그녀는 유창한 한국어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 뒤로 몇 번을 더 만났고,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가 됐다. 마침 여행을 떠나기 몇 주 전, 그녀는 결혼 소식을 알려오며 또 나를 놀래켰다.
'에멜, 너 진짜 결혼해? 나 곧 여행 가는데, 아마 터키도 들를 것 같아. 시간만 맞으면 진짜 갈게!'
'정말? 결혼식은 7월 말이고, 이스탄불에서 할 거야! 그럼 내가 초대장을 보내줄게.'
그녀의 결혼식까지 앞으로 열흘. 열흘 안에 터키의 동쪽 끝인 이곳에서 서쪽 끝자락인 이스탄불까지 가야 해서 서두르기로 했다.
멀리 보이는 아라라트 산
시간이 많이 없기 때문에, 아쉽지만 노아의 방주가 묻혀있다는 아라라트 산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도우베야짓을 떠야 했다. 반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멀리서나마 본 아라라트 산은 이어진 능선도 없이 홀로 서 있는 외로운 산이었다. 그 점 때문에 더 신성한 분위기가 풍기는 것도 같다. 다음 목적지로 정한 곳은 호숫가 도시인 반. 나는 호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몇 년 전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호수에 갔던 것처럼, 호숫가에 쓸쓸히 서 있는 오래된 아르메니아 교회를 담은 풍경 사진을 보고 당장 갈 마음을 먹었다. 다만 결혼식 때문에 반에서의 일정은 짧게 잡았다. 도우베야짓에서 반까지는 4시간. 반에 새로 생겼다는, 유일한 호스텔을 찾아 체크인을 했다.
쿄프테
8인실의 같은 방에는 말 많은 커플이 와 있었다. 마르틴과 사만다, 벨기에와 잉글랜드 커플이었다. 벨기에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히치하이크로만 왔다며, 터키에서는 히치하이킹이 쉽다며 말을 이었다. 터키에 막 도착했다는 나에게 그들은 터키 여행 얘기를 해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정보에 지친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사만다가 사 온 체리를 먹으며 두 시간을 앉아 마르틴의 이야기를 들었더니 얼굴 근육이 아팠다. 방에 다른 투숙객이 들어오길래 슬쩍 그에게 바통을 넘기고 자리를 떴다.
#71 아, 타마르!
반에서의 일정은 이틀로 꽤나 짧게 잡았다. 알마티와 비슈케크에서 만난 터키 친구 메흐메드의 고향집인 카흐라만마라쉬도 가야 하고, 이스탄불에도 결혼식 전에 여유 있게 도착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 하루 만에 아르메니아 교회가 있는 악다마르 섬과 반 고양이 집을 모두 가보기로 결정했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 악다마르 섬으로 가는 돌무쉬를 탔다. '어디에'라는 말을 현지어로 알아두면 항상 유용하게 써먹는다. 비록 이어지는 대답을 못 알아들어도 손가락으로 방향을 이쪽저쪽 알려주니까. 터키어로는 'Nerde'.
"악다마르 돌무쉬 네르데?"
친절한 아저씨들의 바디랭귀지를 따라가면 돌무쉬 정류장이 나온다.
반 시내에서 악다마르 섬으로 가는 선착장까지는 1시간 정도 걸렸다. 선착장에는 배가 기다리고 있다. 왕복 뱃삯은 15리라. 배에 탔는데 갑판에 익숙한 얼굴들이 앉아있다. 마르틴과 사만다, 어제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이야기를 들어서 멈추지 않던 마르틴의 입담이 먼저 떠올라 아는 척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래도 여기서 만나니까 또 반갑다.
"야, 너네도 여기 오는 줄 알았으면 같이 올 걸 그랬네!"
너스레를 떨면서 그들이 앉아있는 뱃머리의 의자에 슬쩍 껴서 앉았다.
멀리 보이는 섬
악다마르 섬은 발음도 입에 착 붙은 느낌이다. 터키인들은 '악!다마르'라고 발음한다. 이런 얘기는 어디서 들어 오는지, 섬 이름의 유래에 대한 마르틴의 설명이 시작됐다.
"옛날에 이 섬에 타마르라는 여자가 살았어. 이 여자의 아버지는 너무 엄격해서, 딸을 섬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지. 하지만 호수 건너 사는 청년과 사랑에 빠졌지. 그녀는 아버지가 잠들면 등불을 흔들어 청년에게 신호를 보냈고, 청년은 그 신호를 보고 헤엄을 쳐서 섬으로 와 그녀와 만나곤 했지. 이를 알게 된 아버지는 폭풍우가 치던 밤 그녀인 척 호숫가를 향해 등불을 흔들었고, 청년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헤엄을 치던 중 폭풍에 휩쓸려 물에 빠져 죽었지. 그는 죽어가며 '아, 타마르!'라고 소리쳤고, 지금도 폭풍이 치는 날이면 그의 절규가 들린다고 해. 그래서 이 섬에는 '악다마르'라는 이름이 붙었대."
악다마르 섬 전설은 이스탄불의 메이덴 타워 전설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아마 같은 모티프가 사용된 것 같다.
도착한 섬은 꽤 콤팩트하다. 야트막한 바위산과 호숫가에 자리 잡은 오래된 성당과 기념품 가게, 스낵바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성당은 19세기 말까지 아르메니아 정교회 총대주교가 있던 중요한 곳이었다. 오래된 성당 안은 지워지다 만 프레스코화가 있을 뿐, 거의 텅 비어있었다. 신성한 분위기 보다는, 오히려 안타까운 기분을 자아낸다. 1차 세계대전 때 발생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때 오스만 군대에 의해 교회는 크게 훼손되었고, 이후 복구 작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난 여기 그늘에 앉아서 쉴게, 너희끼리 다녀와."
성당을 나와 사만다를 두고 마르틴과 바위산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바위산은 철조망으로 막혀있고 터키어로 '접근 금지'일 듯한 경고가 붙어있다. 하지만 역시 우리는 개구멍을 찾았고, '우린 단지 터키어를 몰랐을 뿐' 이란 핑계를 대며 슬쩍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바위산에는 토끼들이 많이 살았다. 그것도 야생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야생 토끼는 올림픽 공원에서 보고 처음 봤다. 토끼들은 바위산을 요리조리 빠르게 뛰어다녔다. 잘 먹고 똥도 많이 싸는지 올라가는 길에는 토끼똥이 한 무더기였다. 토끼들은 똥 싸고 다시 먹는 친구들 아니었나? 다른 맛있는 게 많은지 좀 남긴 것 같다.
올라가는 길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보이는 동물이 바뀌었다. 산 아래쪽은 토끼가, 위쪽은 갈매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고 갈매기들이 머리 위를 빙빙 돌았다.
"지금 저 갈매기들이 우리를 경계하고 있는 거야, 혹시 우리가 둥지에 더 접근한다면 언제든 우리에게 위협을 가할 거야."
아버지가 동물 사진작가라 동물에 관심이 많다는 마르틴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그리고 정상까지 가는 동안 마르틴의 동물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이어서 들어야 했다.
나와 마르틴 둘 다 샌들을 신고 있어서 몇 번 미끄러졌지만, 그래도 무사히 정상을 찍고 섬을 나가는 배 시간에 맞춰 산을 내려왔다. 선착장에서는 반 시내까지 돌아가는 돌무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승객이 다 차야 출발하는데, 승객이 우리 포함 5명밖에 없어 다른 5명을 더 기다려야 했다. 기사 아저씨가 썰어주는 멜론을 받아먹으며 다른 사람들을 기다렸지만, 흘러내린 멜론 물이 말라 손이 끈적해질 때까지 다른 손님들은 오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인 반 고양이 집이 문을 닫기 전 가야 했던 우리는 결국 선착장 앞에서 히치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나와 마르틴이 교대로 길가에 서서 손을 뻗고 차를 세우려고 했다. 차가 꽤 자주 지나다녀서 기대를 걸어봤는데 다들 우리를 못 본 듯 지나칠 뿐이었다. 그러기를 30분, 여기서 포기하고 다시 돌무쉬를 타야 하나 고민하던 중 록음악을 시끄럽게 틀고 지나가던 빛바랜 빨간색의 시트로앵 한 대가 멈춰 섰다. 히치하이킹을 할 때 내 앞에 멈출 것 같은 차는 뭔가 느낌이 온다. '반'이라는 우리의 짧은 한 마디에 그들은 흔쾌히 뒷자리를 내어주었다.
'반 케디 에비'(반 고양이 집)라는 내 말에 그 친구들은 알겠다는 듯 반 시내에 도착해 돌무쉬 정류장에 세워줬다. 우리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차에서 내려 돌무쉬로 갈아탔다. 터키쉬 앙고라의 한 종류인 반 고양이는 보호종이라 반 바깥으로 외부 반출이 금지돼있고, 민간에서도 키울 수가 없다. 그래서 대학에서 운영하는 보호소에서만 볼 수 있다. 하얀 털에 오드아이를 가진 종으로 묘사되는데, 다 그런 건 아니고, 특정 확률로 호박색과 푸른색의 눈을 갖는다고 한다.
개 키우는 집에 가면 보통 특유의 냄새가 나지만, 고양이 키우는 집은 냄새가 안 난다. 하지만 여기는 고양이가 바글바글해서 그런지 고양이 냄새가 났다. 이렇게 많은 고양이가 한 곳에 있는 건 처음 봤다. 나는 고양이 알러지가 조금 있다. 예전에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의 자취방에 1시간 정도 있었더니 눈이 빨개지며 재채기가 계속 나며 눈물, 콧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고양이 집에 들어가니 역시 증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몸의 경고를 무시하고 고양이들이랑 계속 놀았다. 고양이들은 조금 예민한 것 같았다. 고양이가 할퀴고 깨무는 건 처음 봤다. 사만다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집중적으로 노려서 달려드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놀이방 밖으로 나왔다. 물론 알러지가 점점 심해진 것도 있지만.
"차 한 잔 하고 가요." 마침 문을 닫을 시간이라며 관리인 아저씨는 마지막 방문객인 우리에게 차를 권했다. 관리인 아저씨의 친구 두 분도 같이 왔는데, 이곳의 수의사였다. 그분이 영어를 할 줄 아셔서 통역을 해주셨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 고양이집 정원에 테이블과 의자를 펴고 앉아 고양이 이야기를 들으며 터키식 차와 바삭바삭한 크래커를 주워 먹었다. 사실 배가 너무 고파서 빨리 저녁을 먹으러 가고 싶었지만, 아저씨들이 말씀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아저씨들은 차이를 네다섯 잔씩 리필해서 마셨다. 터키인들은 한 번 앉으면 차이 다섯 잔은 기본으로 마시는 것 같다.
"이제 어디로 가세요?"
긴 얘기가 끝나고 아저씨들은 시내로 돌아간다는 우리에게 차를 태워준다고 하셨다. 퇴근하는 그분들의 차를 얻어 타고 편하게 시내로 돌아왔다. 호스텔 스탭이 추천해준 이탈리아 식당에서 파스타와 맥주를 먹었다. 우즈베키스탄을 떠난 이후로 약 한 달만에 처음 먹는 술이다. 두 병 밖에 안 먹었는데, 오랜만에 술을 먹어서 그런지 조금 어지러웠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 뱃속은 잔뜩 맥주 거품이 낀 듯 부글거렸다.
#72 대대적 물갈이
새벽 5시, 날이 어슴푸레 밝았다. 화장실의 변기 옆으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총총 걸어간다. 혹시 내 발 위로 올라올까 발을 들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말썽이던 속은 더 안 좋아졌다. 이상하게 속이 쓰리고, 아랫배가 아프다. 아무래도 설사병에 걸린 것 같다. 오전 내내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다. 오늘 카흐라만마라쉬로 가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일단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버스는 저녁 7시에 출발하는 야간 버스가 있다. 대충 그전까지는 괜찮아지겠지, 싶어서 체크아웃을 하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카페에 앉아서도 계속 배에서 신호가 왔다. 결국 호스텔로 돌아와 멋쩍게 다시 체크인을 했다. 쉬면서 편하게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할 곳은 여기밖에 없다.
그렇게 하루하고도 절반을 꼬박 침대와 화장실에서 보냈다. 탈수가 걱정돼 물을 계속해서 마셨다. 다행히 이튿날부터 몸이 나아져 조심스럽게 수프와 빵으로 식사를 해봤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못 먹다 먹은 토마토 수프는 너무 맛있었다. 빵으로 접시까지 깨끗이 닦아먹고, 버스 회사의 사무실에 들러 저녁에 출발하는 카흐라만마라쉬행 버스표를 샀다. 이제 표까지 샀으니 어쩔 수 없다. 14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내 위장이 아무 문제도 안 일으키기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