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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조앤 Aug 13. 2021

안녕을 안경이라 들을 때 / 박지웅


너는 안녕이라는데 나는 안경이라 듣는다

너는 안경을 안녕으로 * 바루어 주고

나는 안녕을 다시 안경으로 고쳐 쓴다

안 보여? 너는 눈썹을 모은다

네가 내 흐린 안경알을 문지르는 동안

우리 사이에

사이가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


안경을 끼니 안녕의 세계가 선명해진다
네가 없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안경의 세계와 안녕의 세계는 얼마나 다른가
나는 처음 보는 세계로 들어간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O...an(안)K...yung(경)


​안녕이 자꾸 콧등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나는 안녕을 끼고 안경을 닦고 있다




박지웅,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북인, 2019년, 39쪽 [출처 일간_시를 읽는 아침 주영헌]

*바루다 : 비뚤어지거나 구부러지지 않도록 바르게 하다. ​ **그림은 둘째가 오래전에 그린 것.






두 단어의 어긋난 만남이 놀라웠다. 고2부터 나는 안경을 썼다. 늘 뒷자리였는데 칠판 글씨가 그때부터 잘 안 보였다. 나는 한 번도 안경과 안녕을 헷갈려본 적 없는 사람. 아니 어떻게 헷갈릴 수 있단 말인가?

시인은 단어를 관찰하는 사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골똘히 오래오래 생각는 사람. 단어와 단어 그 허공 사이를 헤매는 사람. 자음과 모음을 조립하고 해체하는 사람. 그의 눈과 귀와 입을 통해 세상이 새롭게 편집되고 만들어지기를 꿈꾸는 사람.






안경을 벗으면 안녕도 흐릿해지길 바래. 선명한 안녕은 아플 테니까. 어쩌면 안경을 도로 껴도 안녕은 여전히 흐릿할 거야. 내 눈의 시력은 이미 떨어졌을 테니까. 이제 안경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거야. 네가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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