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쓰조앤 Apr 28. 2021

이순신을 떠나보낸 밤

必死則生 必生則死

반드시 죽으려는 자는 살고
반드시 살려는 자는 죽는다.

전장에서만 통하는 말일까.
이 역설을 어찌해야 할까.

내가 수영을 못 배우는 까닭은, 힘을 빼면 부력으로 내 몸이 물에 뜬다 하지만, 힘을 빼면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아 더 힘을 주고 더 허우적거리기 때문이다. 힘을 뺄 줄 모르기 때문이다. 힘을 뺀다 함은 힘을 조절할 줄 안다 함이다. 이 조절에 늘 실패하는 것이다.


물이 무섭다. 단단한 땅에 발 닿는 것만 안전하다는 경험 때문인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의 부드러움은 내겐 제어할 수 없는 무력함이고 그 무력함은 무서움으로 바뀌었다. 부력에 의해 물 위로 떠올라 앞으로 나아가기도 전에 부력으로 매번 중심을 잃었다. 까짓, 코로 물이 들어오면 좀 어때서, 귀로 물이 잠시 채워지면 어때서, 물속에서 잠시라도 눈을 떠보는 것이 무어라고... 아아, 나는 무섭다. 나의 의지로 해낼 수 없다. 수영 배우기를 손놓았다.

이순신은 죽고자 하면 산다 하지만, 살아있는 육신의 필요를 따라 살아가는 내가 죽기를 각오하는 일은 나의 경험 위에 세울 수 있는 계획이 될 수 없다. 조그만 상처에도 진땀이 흐르는데, 한 끼만 거르려 해도 내 몸은 긴장 상태로 전환되는데, 언감생심 죽기를 각오한다는 말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심각한 사태를 눈앞에 둔 상황이 아니라면. 그렇다고 적을 코앞에 두면 가능한 다짐일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항전도 선택이지만 항복도 선택이다.

몸을 가진 자에게 죽음은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그 경험 위에 다시 무언가를 도모할 수 없는 일회성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작가 김훈은 말했다.



이순신은 살고자 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죽고자 한다면 반드시 살 것이라고 명량으로 나아가기 직전에 썼다. 혹, 써야만 했던가...

그리하여 나는 이 말을 내 삶에 적용시켜 볼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매번 그의 굳은 결의와 비장함만이 뜨겁게 날카롭게 마음 판에 새겨져 가슴 한가운데가 먹먹해질 뿐이다. 책을 읽고 난 후 내내.

그가 출정하여 나간 노량해전은 그가 준비해 왔던 싸움이었다. 그가 살고자 했다면 퇴각하는 무수한 적선을 쫓아서 격파시키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을 것이다. 바다에서 죽기를 각오했고, 바다에서 그는 죽었고, 7년 동안 치렀던 임진왜란은 그날 승리로 끝났다.

살고자 손에 힘을 주지 않는 일은 내일을 위해 쌓아두지 않는 일과 같은 말일까. 내 욕심이 대부분 과욕임을 깨닫는 일일까. 내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게 실상은 별로 없다는 것을 아는 일일까.

<죽음> 이후는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일일 터. 내 죽음을 본 자들만 나를 기억할 텐데, 이순신의 죽음은 너무나 생생하여 나는 그를 잊을 수 없다.

포탄에 맞은 그의 군의를 내가 벗겨주고, 무거운 그의 어깨를 내 앞에 내려놓은 듯도 하다. 이순신의 흐려가는 두 눈빛에 담긴 하늘을 내가 내려다 본 듯도 하고, 점차 힘이 빠져가는 그의 두툼하고 거친 손을 내가 붙잡고 있었던 듯도 하다. 죽기를 각오한 한 남자, 홀로 바다 앞에서 자신과 적들을 대면했던 한 사람과 이별하는 슬픔을 어찌 말로 무어라 할 수 있을까. 가슴에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깊게 안고 하염없이 바다에 떠있고 싶다. 그렇게 밤이 오고. 별이 뜨고.. 달이 질 즈음엔 그를 놓을 수 있을까... 그는 이 생에서의 고독을 내려놓고 떠났을까... 궁금한 밤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순신, 만날 수 있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