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총회는 성큼 다가왔다. 약속했던 금요일엔 마침 오픈 조라서 일도 일찍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자, 졸음이 쏟아졌다. 월, 화, 수를 일찍 일어나서 늦게 잠고, 목요일 저녁엔 여자 친구를 만나서 영화를 보고 왔더니, 피로가 꽤 쌓인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잠이 들어서 오후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2시에 퇴근해서 집엔 3시가 안돼서 들어왔을 텐데. 이리저리 헝클어진 머리와 퀭 한 눈동자를 보면서 한숨이 나왔다. 이런 생활을 4년을 이어가야 한다. 과연 나는 잘 해낼 수 있을까?
매일 글을 쓰리라 생각했던 것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책을 읽을 시간도 별로 없어서 일주일에 한 권씩 읽어치우던 작년과는 달리, 한 달에 한 권 읽기도 버거워져 버렸다. 조금 나태해진 탓일까. 옷을 벗어서 한쪽에 던져두고선, 거울 앞에 섰다. 운동도 못해서 몸도 축 처져있는 것 같았다. 흐물흐물한 몸뚱이에 따뜻한 물을 끼얹자, 몸에 살짝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따스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들이 쌓여서 지금 이렇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조금 피곤할 뿐이지.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개강총회에는 전 학년이 온다고 했다. 7시 30분까지 예약된 고깃집으로 가야 했는데, 시간을 딱 맞춰서 가는 게 좋을 듯싶었다. 일찍 가서 뻘쭘하게 혼자 앉아있는 건, 최악이다. 특히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나는 더더욱.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 근처에 도착하니, 7시 20분이었다. 근처를 한 바퀴 빙 돌아서 30분에 가까스로 맞춰서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내가 들어가니, 약간 긴가민가한 얼굴로 과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동기가 맞는지 아직 기억 못 하는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인사했다. 1학년 자리가 어디냐고 물어보자, 3명이 이미 앉아있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저쪽에 앉으라고 했다. 과대는 학년과 이름이 쓰여있는 명찰을 나눠주고 있었다. 나는 명찰을 받아 목에 걸고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그곳에 먼저 있던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술잔을 채웠다. 술이 아니라 어색함이 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앞에는 여자 동기들이 2명 앉아 있었지만, 옆에는 남자 동기가 앉아 있었다. 남자 동기는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지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는 곳이나, 일하는 곳, 일자리의 분위기나 주량 따위를 말이다. 그런 노력들이 어색하게도 대화는 툭툭 끊겼다. 여자 동기들은 둘 다 23살이었다. 남자 동기는 25살로 동갑이었다. 우리 테이블에선 그 누구도 활발하게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나는 여자 동기들보다 조금 적은 남자 동기들이 궁금했다. 테이블이 너무 적막해지면 조금씩 물어보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는 취업자 전형으로 들어왔으며 일반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 대신 취업을 했다고 말했다. 취업자 전형은 장학금을 안 줘서 420만 원을 고스란히 내야 했다는 말과 함께 다른 취업자 전형 입학생들이 궁금해졌다. 그 돈을 주고 들어온 신기한 사람들이 말이다. 나였다면 그 돈 주고 대학 다니진 않았을 텐데.
나와 마주 보고 있던 여자 동기는 말이 무척이나 없었고, 우리에게 궁금한 것도 없어 보였으며 수줍은 건지, 앞에 앉은 우리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원래 말이 없는 건지, 너무나 조용했다. 어떤 질문이든 단답이었다. 다른 여자 동기는 회식 자리를 꽤나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술도 잘 마시는 편이었고 나름 말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주로 여자들과 떠들어서 나와 남자 동기가 뻘쭘했을 뿐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서 젊은 직원이 별로 없다며, 자신이 회사의 비선 실세라고 말했다. 한마디 하고, 건배하면서 술 마시는 회식 분위기가 좋다면서 자기는 술 좋아한다고, 혼자서도 소주를 잘 따라 마셨다. 회식이 좋다는 사람은 참 신기하다. 내가 경험했던 거제도의 회식 분위기는 젊은 직원들이 결코 좋아할 수 없는 분위기니까. 물론, 내 돈이 아니라 회사 돈으로 비싼 밥 먹는 건 좋지만, 술을 강요하는 분위기, 안 마시면 안 되는 분위기는 끔찍했다.
그렇게 어색함과 고기가 함께 익어갈 때, 중간에 있던 스피커에서 쇳소리가 났다. 학생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소개와 학과장의 건배제의가 있었다. 우리 과는 총 80여 명 정도 되는 작은 과였다. 그나마도 신입생이 39명이었다. 4학년이나 3학년은 학생수가 매우 적었다고 한다. 17년부터 점차 많이 들어왔다고. 한창 부흥 긴가 싶었다.
그는 신입생들에게 마이크를 건네주면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말했다. 원래 신입생들이 올 때마다 한 번씩 한다면서. 거창한 말은 없었고 다들 나이와 이름만 말했다. 생각보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다. 가장 어린 사람은 22살까지도 있었고, 가장 나이가 많은 편은 28살과 30살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고학년들은 어느새 다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각 학년의 과대들이 남아서 테이블을 돌고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선배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긴 애매했는데, 나이가 나보다 어리거나 같은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저 나이를 물어보고 호칭을 정리했다. 웬만하면 다들 존대하면서 술자리를 이어갔다. 나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꾸준히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거제도에서 올라오는 전 회사 동기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서 빨리 일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내 주변 사람들이 여러 번 바뀌었다. 과대들이 자리를 비우자, 다른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자리를 채웠다. 덕분에 다른 남자 동기들과도 조금씩 말을 하긴 했다. 별건 아니고 나이를 물어보고 뭐하는지 물어보는 게 전부였지만. 옆 테이블에서 처음부터 건배하자고 잔을 들이대던 여자 동기가 비틀거리면서 내 옆으로 왔다. 옆에선 부축해주는 다른 여자 동기가 있었다. 얼굴은 짙은 화장 덕분에 처음과 똑같았다. 하지만 걸음걸이와 함께 테이블의 모든 것을 건드리며 쏟아버리는 행동에는 취기가 가득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맥주를 쏟은 테이블 근처에는 내 옷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사회생활도 한만큼 했을 사람이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참 이상했다. 나에겐 어색하고 지루하며 재미없는 자리였지만, 그녀에겐 꽤나 재밌고 즐거운 자리였나 보다. 내가 조금 더 말을 붙이려고 노력했으면, 더 친근하게 행동했으면 나도 이 자리를 제대로 즐길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 회사, 군대를 다녔지만, 아직도 어색한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는 못 배웠다. 시간이 해결해주길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조용히 옷을 들고 와서 고깃집을 나섰다. 계산은 학생회에서 알아서 하겠지. 거제에서 올라오는 전 회사 동료이자, 친구가 올라온다고 했다. 오후 11시쯤 도착한다 했으니, 슬슬 가면 딱 맞을 것 같았다. 고깃집 밖으로 나왔는데도 고기 냄새와 술 냄새가 풍겼다. 내 몸에서, 그리고 옷에서 나는 냄새였다. 아직 싸늘한 밤공기가 얼마 없던 술기운과 냄새를 날려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