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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도둑 Mar 12. 2019

'잔'

밴드 O.O.O

술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술 잘 마셔요?'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꼭 있다. 이때 잘 마시냐는 소리는 얼마나 많이 마실 수 있냐는 소리다. 술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 마시는 것, 많이 마실 수 있다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다. 적어도 나에게는.


20살에 처음 거제도로 내려가 술을 배운 이후, 가급적 많이 안 마시려고 한다. 그 회사에서 일하면서 이미 충분히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평생 동안 마실 수 있는 술의 양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 절반을 이미 마신 것 같다. 그래서 술을 줄이려고 해도, 그게 쉽지는 않다.


O.O.O의 노래 중에, '잔'이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는 이렇다.


'붉은 해가 저물고 검은 밤이 오면

언제나 그랬듯 또 집을 나서네

오늘 밤도 취할 것만 같아


나 언제부턴가 취하지 않으면

잠이 오질 않아 끝없는 들이킴

술잔으로 뒤덮인 나의 밤

미련하다고 욕하지 말아요

난 오늘도 잠들고 싶어요

다른 방법 나는 알 수가 없어요


내 앞에 놓인 잔에게 기도해

제발 나를 꿈으로 데려가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이젠 나의 모든 생각을 꺼줘

끝없는 외로움 다 지워줘

오늘 밤도 나 편안히 잠이 들 수 있게'


오늘이 아주 힘들었을 때, 편의점을 지나가다 보면 4캔에 만원 하는 수입 맥주의 유혹을 뿌리 칠 수 없다. 가방에 맥주 4캔을 욱여넣고, 햄버거 하나를 안주 삼아서 맥주를 마신다. 오늘 힘들었던 일들이 그 한잔에 녹아내리고, 머리에 가득했던 실수와 아쉬움이 떠내려간다. 살짝 몽롱해진 정신으로 잠자리에 들고 눈을 뜨면 기분도, 마음도 다시 가라앉는다.


스트레스를 술로 푸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퇴근하고 술을 한잔 마시면서 감정을 내려놓는 건 필요하다고 본다. 알코올은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고, 경직된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잔을 비우면서 마음도 비우고, 스트레스도 알코올과 함께 날아가도록.



O.O.O의 가사를 듣다 보면, 자신의 상황과 고민이 겹쳐서 술이 아니면 밤을 견디기 힘들어 보인다. 실연 이후 쓴 가사일까. 밤을 술잔으로 뒤덮는 경우는 흔치 않다. 원래부터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잘 마시는 사람이라도 술의 힘을 빌어서 잠에 들려하진 않는다. 마음에 상처가 있어서 술로 소독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하는 일이 안 풀려서, 고민이 너무 많아서 술이 아니면 그 생각을 머리에서 떨칠 수가 없을 때가 아니면 말이다.


그 정도로 힘들 때는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한다. 정서적으로 너무 불안할 때, 술을 마시면 이성이 끊기는 경우가 생긴다. 그럼 실수할 것 같았다. 감정에 치우쳐서 후회할 짓을 할 것 같았다. '잔'을 들으면 술을 마시면 안 될 정도로 힘들 때가 떠오른다. 술을 마시고 싶지만, 술 취하면 사고 칠 것 같을 때, 대신 듣게 된다. 오늘 밤도 편히 잠들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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