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는 쓴 맛이 아니라 짠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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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자, 소설인 '초속 5cm'에서 한 소녀가 나온다. 파도타기에 성공하면 자신이 짝사랑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한 소녀가. 그녀는 아침부터 바다에 나가서 파도와 기나긴 줄다리기를 시도한다. 파도의 위에서 올라서겠다는 그녀의 집념을 보면서 나는 파도타기가 얼마나 어려울지 궁금했다.
그 영화는 서핑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 줬다. 나는 유럽 여행에서 처음 서핑을 배웠고, 그때는 보드 위에서 설 수는 있었다. 비교적 잔잔한 바다였으니까. 하지만 파도 위에서 설 수는 없었다. 그건 또 다른 세상이었다. 바다는 시시각각 변한다. 파도를 잡아서, 올라타려면 파도를 기다려야 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피해서 먼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태풍의 여파로 바다는 거칠었고, 파도는 더 심하게 날뛰었다. 그 파도에 맞아 뒹굴기도 하고, 서핑 보드가 크게 튕기며 나를 해안가로 끌어당기기도 했다. 때로는 파도에게, 때로는 서핑 보드에게 얻어 맞고 뒹굴수록 오기가 생겼다. 그러면서 또다시, 한 소녀가 생각났다. 아, 그녀가 왜 '고백'이라는 것을 파도타기로 결정하려고 했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내가 간절히 원하던 목표를 달성하면, 성공이란 것을 경험하게 되면 '자신감'을 얻기 마련이다. 그 자신감은 때로는 사람에게 독이 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평소라면 절대 못할 일을 하도록 도와준다. 그 소녀에겐 '고백'이 그랬다. 절대 못할 것 같은 그녀의 고백은 파도타기의 성공으로 그에게 전해진다.
양양의 서핑 비치에서 나는 하나의 버킷 리스트를 이뤘고, 하나의 버킷 리스트를 추가했다. 서핑하는 것과 파도타기에 성공하는 것. 오기를 품고 무작정 파도에게 덤볐으나 패배했다. 올해, 혹은 내년에는 다시 한번 바다에 나가서 파도의 위에 서보고 싶다. 거칠게 날뛰는 파도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다.
분위기와 썸은 못 탈지언정, 파도 하나 정도는 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