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의 아서 플렉
아서 플렉이 분노에 가득 차 어머니를 죽이면서, 내뱉는 대사는 이랬다.
“난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개 같은 코미디였어.”
누군가는 영화 ‘조커’를 선량한 소시민이 서서히 타락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본 아서는 이미 망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망가진 걸 깨닫는 과정으로 보았다. 주인공 아서는 어릴 적에 학대를 당했고, 그 여파로 정신병원에도 수감되었던 사람이다. 입양한 어머니로부터 정신적 질환을 유전적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물려받는 셈이다.
그의 삶은 불행과 고통 속에서 맴돌았다. 차곡차곡 쌓인 분노는 그를 비정상적인 삶으로 이끌었다. 그는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도 공감하지 못한다. 코미디 쇼에서 혼자 이상한 타이밍에 웃고, 다른 사람을 웃길 거라 생각한 조크는 전혀 웃기지 않다. 타인의 웃음에 공감하지 못하던 아서는 자기 자신을 깨달아간다. 망가져버린 괴물이란 사실을 말이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말했다. 아서 플렉이 어머니를 죽이며 하는 대사는 이런 의미로 다가왔다. 그동안 가까이서 봤던 내 삶을 이젠 멀리서 보겠다. 가까이에서 보았던 삶은 힘겨웠다. 사회에서 무시받고 고통받던 그는 사회적 통념 가까이서 살기를 관둔다. 그리고 자신을 멀리서 바라보기 시작한다. 여태껏 신경 써왔던 사회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입양해준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을 배신한 친구를 죽이고, 자기를 웃음거리 삼았던 우상을 죽인다. 멀리서 보기 시작한 아서는 조커가 되어 더 이상 고통스럽게 웃음을 내뱉지 않는다.
감정에 충실한 살인을 저지르던 그를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 우습게도 그들은 조커를 우상화시킨다. 기득권에 대항하는 소시민의 영웅적 행보로 여긴다. 조커가 사회적인 시선과 사람들의 상식을 벗어나서 행동하듯, 그들 또한 상식을 벗어난 행동으로 그를 구한다. 앰뷸런스로 경찰차를 들이박으면서 그를 구하는데, 그가 다치던 죽던 신경 쓰지 않는다. 조커는 부상당한 채로 경찰차 위에 꺼내진다. 일어난 그는 공권력 위에서 춤을 춘다. 사회가 주었던 절망 위에서 춤을 춘다. 객관적인 비극을 벗어나 주관적인 코미디 위에서 춤을 춘다.
이 영화는 소시민의 타락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정신병자가 광기에 몸부림치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아서 플렉이 조커로서의 본성을 깨닫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객관적인 비국이 어떻게 주관적인 희극으로 변해가는지 보았다. 우리가 아서를 동정하는 이유는 처절한 그의 삶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절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가 삶과 죽음을 주관적으로 정할 권리는 없다. 우리는 아서를 동정하고 공감할 수는 있지만, 조커를 납득하고 정당화할 수는 없다. 감독은 우리에게 아서가 조커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어떤 끔찍한 과정이 있더라도 결과에 대한 면죄부는 될 수 없다. 우리가 아서에게 공감하더라도 조커처럼 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사실 때문이다.